첫째, 자기 십자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눅 13: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미움을 사는 정도가 아니라 죽이고 싶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을 돕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말한 것은 예루살렘에서만은 죽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속셈을 아십니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내가 갈 길을 가겠다” 예수님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자기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사랑의 십자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눅 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한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만행을 생각하면 주님은 심판을 불같이 내리셔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사랑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심판은커녕 오히려 그들을 주님 날개 아래 품어 주시고 또 품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십자가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셨습니다. 사랑의 십자가가 세상을 살릴 수 있습니다. 원수와 맞서서 싸우는 그리스도인보다 사랑의 십자가로 원수까지도 품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능력 있는 크리스챤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사랑의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인내의 십자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눅 13: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이 고발당한 진짜 이유는 그들이 주님의 사랑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거부한 댓가는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버리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의 이름을 찬송하는 그날을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기적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인내로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의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