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살이에서 목표의식이 분명하지 못하거나 어떤것에서도 희망을 가지지 못한다면 삶의 의욕을 잃게될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대한 목적과 철학이 분명하지 못해서 귀한 시간들을 허비하거나 방황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현대사회가 물질생활이 풍요로워지고 첨단 과학의 발달로 인한 문명의 이기를 향유하면서도 정신적인 공백으로 방황하는 세태을 실감하고있는것입니다.
나라마다 새로운 정치로 희망의 돌파구를 찾아보려 하고 또 막강한 경제력으로 사회의 안전망을 구축하려 애를씁니다.
그 외에도 문학이나 예술의 가치로 사람들의 정신문화를 향상시키려 애를 쓰기도 하지만 이와같은 인위적 처방들이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가져오지 못하고있는것입니다. 이것은 범죄한 인류에게 지워진 숙명적인 한계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근원적인 문제를 풀어가는 해결사 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에게는 결코 정되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하였습니다.
1.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인간이 쓰는 용어중에 ‘사랑’ 이라는 말 보다 더 아름다운 말은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행복의 요소입니다.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편리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먹는 것, 입는 것, 누리는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다 채워 졌더라도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줄수가 없다면 절대로 행복할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있습니다.
1)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혈연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혈연적 부모 자식이 아니라 영적이고 신비적인 관계입니다. 로마서 8;15에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라 하고 ‘아버지’ 라고 부른다는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동물적인 본능이라 할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악한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고 하였습니다(마7;11)
이사야 49;15에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기업을 받게됩니다. 롬8;17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시련을 겪을수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기업을 상속받을자 이기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여기시고 극진히 사랑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3;1에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속하시고 성령께서 지명하여 불러 내시고 하나님 자기의 것이라고 인치셨습니다.
고전6;20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9;16에는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범죄 하므로 마귀의 종이 되어 영원히 멸망 받을 인간들을 독생자의 보혈로 값주고 사셔서 자기의 소유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그토록 집요한 사랑을 베푸시는것입니다.
사람들도 자기의 소유된 것은 무엇이나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지만 지킬 힘이 없을 때 빼앗기고 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어떤 세력에게도 내 주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41;10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거는 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쏟으시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3;21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다윗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신 이유도 그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기대가 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행13;22)
드라마 작가가 작품을 쓸 때 그 작품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연출을 하게 하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목적에 부합하는 그 사람을 세우시고 역사의 주역이 되게 하십니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은 그 어디에도 비교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대가 있는 사람은 절대로 무너지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붙들고 계십니다. 본문 말씀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라고 하였습니다.
고후4;8-9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 하십니다.
본문 31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라고 하였습니다.
1) 일을 하시는 하나님.
예수님께서는 요5;17에 “내 아버지께서 일 하시니 나도 일한다”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적절하게 관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상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신 분이고 전능하신 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것이로다” 고 하였습니다(롬11;33)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먼 훗날의 일 까지 다 예측하시고 거기따라 준비하십니다.
렘33;3에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그가 준비하신 크고 비밀한 일을 행하시고 보이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일은 모두 택하신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하시는 일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는일입니다.
본문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셨다고 했습니다.
33절에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라고 하였습니다.
시조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죄아래 있고,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해 두셨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정죄할수 없습니다.
로마서8;3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셨다” 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3;23-24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3) 성령으로 신비로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천하만민에게 하나님 섬기는 사람의 표본이 되게 하시고 축복의 통로로 삼으십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수준으로 신앙과 인격으로 양성시키십니다. 이 일은 성령께서 주도하시고 날마다 그리스도의 성품에 이르도록 감동하시는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옛사람의 성품이 살아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생활을 하곤합니다.
로마서8;7-8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지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3. 우리에게는 절망이 없습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OECD 회원 국가중에 자살 율 1위라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먹고살기 힘들어서 자살을 한다면 과거 6.25때나 가난하던 시절에 아무도 살지못했겠지요. 오히려 물질생활이 풍요로워지고 문화적 삶의 질이 향상되어도 삶에 대한 의욕과 희망을 상실했다는 뜻일것입니다.
성도들도 세상이라는 한계상황 속에서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하고 힘든 과정이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절망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우리를 위해서 일을 하시는분이기 때문입니다.
1) 자기 중심으로만 판단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자는것입니다. 말로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 해놓고 실제로는 하나님을 자기의 수준에다 맞추곤 합니다.
이사야40;25에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고 하였습니다. 40;26에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또 유일한 주권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수준을 자기의 눈높이다 맞춰놓고 하나님의 권능을 축소시켜버립니다.
마틴 루터의 아내는 루터가 낙심하고 좌절할 때 상복을 입고 나왔더라고 합니다. 루터가 “누가 죽었느냐?” 고했더니 “하나님이 죽었다”고 했다는것이지요.
2) 극단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인간이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때 그것을 최선의 상황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밤 4경까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바다위로 걸어 오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저희를 구해 주기 위하여 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하며 소리쳤습니다(마14;26) 이때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고 하였습니다.
여간 믿음이 있는 사람도 너무 힘들고 오래도록 고통에 시달리게 되면 낙심하게됩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막말을 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하면 않됩니다.
욥의 아내는 극심한 환난을 견디기 어려울때 남편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고 막말을 퍼부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삶을 포기하는 등 극단적인 행동으로 돌이킬수 없는 불행을 자초하곤 합니다. 이런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소치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인간의 한계에 부디치게 되면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으며 기다립니다.
이스라엘이 홍해 앞에서 발을 동동구를 때 모세는 백성을 향하여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하였습니다(출14;13)
3) 하나님께서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십니다.
꿈과 환상의 사람 요셉은 억울하고 견디기 힘든 과정을 거쳐서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자기 앞에 엎드려 절을하며 용서를 구하는 형들에게 “내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사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창50;20)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한평생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풍파를 다 겪곤 하지만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됩니다. 내 인생의 상사화복도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정말 한 평생을 살고나서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할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