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에게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그 가운데 세우시고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천국 시민의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어린아이는 가정의 꽃이요, 나라의 희망입니다. 어린아이가 없는 가정이나 사회는 쓸쓸하고 삭막합니다. 그것은 미래가 없고 희망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어린아이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의도하시는 어린아이 운동의 특징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어린아이의 성격을 닮는 것
성경에는 어린아이의 순수하고 때 묻지 않는 성품을 그리스도인의 자질과 비교하였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밝고 깨끗한 성품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소양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땅에서 돋아나는 연한 순같이 흠도 없고 티도 없는 분으로 묘사하였습니다(사 53:2).
1) 겸손한 성품입니다.
4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겸손은 예수님의 본성입니다. 빌립보서 2:6-7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었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벧전 5:5).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반대되는 성품을 가진다면 곤란합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자기가 크다고 우겨대는 제자들을 보시면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마 20:27).
2) 진실한 성품입니다.
베드로전서 2:2에는 “갓난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갓난아기는 때 묻지 않은 깨끗한 성품을 의미합니다. 또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뜻합니다.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사람은 어린아이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따라서 살게 됩니다. 어린아이의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거짓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 하면서 수용하게 되고 거기서 신비로운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마 11:25).
3) 단순한 성품입니다.
어린 아이는 성품이 단순합니다. 어른들은 어떤 사건에 접하게 되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고 여러 가지 경우에 따라서 적절하게 대처하려고 합니다. 매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에게 유익하게 되는 것과 불리하게 되는 것에 따라서 판단을 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본 대로, 들은 대로, 느끼는 대로 행동합니다. 이런 것이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은혜를 받았을 때 감사하고, 자기의 잘못을 느꼈을 때 즉시 그것을 회개하며 고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외식적인 신앙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른 행위를 하면서 그것을 합리화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3:27). 어린아이 운동은 속마음과 나타나는 행동을 같이하는 운동입니다.
2. 어린아이를 용납하는 것
마태복음 19:14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들의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도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비록 자기와 다른 성격을 가졌더라도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1) 이해해야 됩니다.
미개하고 닫힌 사회일수록 어린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자와 어린이를 사람의 수에 넣지도 않았습니다(마 14:21).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예수님께 안수를 받기 위하여 어린아이를 안고 오는 여인들을 막았습니다(마 19:13). 어린이를 멸시하거나 인권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통해서 어른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요 6:9, 삼상 3:4).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길가의 어린이들이 호산나를 연호하며 주님을 찬양하였으나 어른들은 이를 문제 삼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어린이들을 칭찬하였습니다(마 21:16).
2) 영접하여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의 접근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마 19:14).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주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5절).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는 미성년의 어린아이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뜻이 있습니다(마 11:25). 바리새인들처럼 거짓된 마음과 외식이 생활화된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을 따르는 순전한 사람들을 어린아이로 취급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9:1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내보내시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0:40).
3) 실족케 하지 말아야 됩니다.
6절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6:4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어린이에 대한 어른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올바른 교육을 시켜야 되고, 몸소 이를 실천하므로 삶의 본을 보여야 됩니다. 부모에게서 실망한 자녀들은 방황하거나 실족하고 맙니다. 여기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뜨려야 된다고 하신 말씀은 준엄한 징벌을 뜻합니다. 병든 사회가 어린이를 범죄에 이용하고 탈선하게 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호하는 천사를 보내서 그의 자녀들을 항상 지키게 하신다고 약속했습니다(시 91:11). 10절에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사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1)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고전 10:31).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만 됩니다(롬 12: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지혜와 계시의영을 받아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기업의 영광이 무엇이며 날마다 공급되는 능력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엡 1:17-19). 어린아이가 엄마의 얼굴을 마주 대하면서 눈빛만 보고도 그 마음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얼굴 앞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눈높이를 맞추며 그 속뜻을 헤아리게 됩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지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셔서 하나님의 성품에 맞출 수 있도록 작용해 주기 때문입니다(롬 8:9-10).
2)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게 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한 몸에 받으며 사는 것을 뜻합니다. 옛날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한 축복을 선언하면서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민 6:25-26).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은 저주와 징벌을 상징하지만(렘 2:27),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은 최상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집에서 함께 사는 자의 행복을 ‘참새의 집과 제비의 보금자리’로 비유하였고, 거기서 하루를 사는 것이 다른 곳에서 천 날을 사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시84:1-10). 하나님의 교회를 중심으로 임마누엘의 생활을 하게 될 때 그 얼굴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하며 살게 됩니다(시 42:5).
3) 승리적 삶의 원천입니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천사와 씨름을 했던 야곱은 다음 날 아침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창 32:30).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밤이 새도록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천사의 일격에 허벅지 관절이 이골되는 부상을 입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승리의 영광을 안겨 주었습니다. 곧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라”는 뜻입니다(창 32:28).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며 사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승리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고전 15:57). 구약의 호세아는 범죄하므로 징벌을 받아 기진맥진 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한시 바삐 여호와께로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살자고 하였습니다(호 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