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고 섬기는 자입니다(고전 2:10). 그들은 성경의 계시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의 목적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따금씩 하나님의 약속이 빗나가는 것 같은 상황에서 마치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황당한 경우가 생기곤 합니다. 욥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이해 못할 재난을 당하면서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는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했는데도(10절)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다고 하였습니다(4절). 그는 또 하나님이 자기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시고 손을 들어 저를 끊어버릴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9절). 우리도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이라고 푸념할 때가 있습니다. 1. 불가사의(不可思議)하신 하나님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불가해(不可解)성에 대하여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사 55:9). 하나님의 뜻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보편적인 상식에서 벗어날 때 쉽게 납득할 수 없습니다. 1)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마 5:10). 사도 베드로는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벧전 2:19).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문제를 당했을 때 쉽게 수용하기가 어렵습니다. 욥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욥기 1:1에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다”고 하였습니다(1:8, 2:3).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수천 대까지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였습니다(출 20:6). 복을 받아야 될 욥이 환난을 당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2) 공의가 무너지는 경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61:8에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하게 되는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회의를 갖게 됩니다. 말라기 2:17에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나라에 재판이 공정하지 못하면 사회의 질서가 무너지듯이 성도가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게 되면 경건한 생활을 포기하게 됩니다(말 3:14). 이럴 경우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이 억울함을 호소하게 됩니다(계 6:10). 3) 사탄의 요구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사탄은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없다고 하며 충동하였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욥의 소유물을 치시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향해서 욕을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욥 1:9-11). 문제는 이와 같은 사탄의 말을 하나님께서 수용하셨다는 점입니다. 욥기 1:12에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사탄의 손에 넘겨주는 순간 사탄은 악랄한 방법을 그를 유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마귀를 대적하라고 해 놓고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요구를 들어주시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군대 귀신 들린 자를 만났을 때 귀신들이 돼지떼에 들어가게 하여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마 8:31-32). 2. 설상가상(雪上加霜)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산 넘어 산’이라는 말과 같이 한 가지 재난을 피하고 나면 또 다른 사고가 겹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울이 바다에서 구조된 다음 뱀에게 물린 것을 보고 사람들은 “바다에서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리지 못함이로다”고 하였습니다(행 27:4). 1) 연쇄적인 재난입니다. 재난이 연거푸 겹치는 경우를 두고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갑자기 들이 닥친 환란이 숨돌릴 여유를 주지 않고 연쇄적으로 밀려왔습니다. 처음 전해 온 소식은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와서 그것들을 빼앗고 종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1:15). 또 다른 종이 와서 하는 말은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들과 종들을 살라버렸다고 했습니다(16절). 다음은 갈대아 사람들이 떼지어 와서 낙타를 빼앗고 종들을 죽였다고 했습니다(17절). 곧 이어 욥의 자녀(7남3녀)들이 맏형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데 돌풍이 불어와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모두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19절). 마지막에는 사탄이 욥의 몸을 쳐서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종기로 인하여 고통당했습니다(욥 2:7). 2) 사람들의 비방입니다. 욥기 2:8에는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욥의 아내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남편에게 위로를 하지 않고 오히려 독한 말로 괴롭혔습니다. 욥기 2:9에 “그의 아내가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후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었습니다(욥 2:11). 이 사람들은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논리로 욥을 몰아세웠습니다. 육체적 고통보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는 정신적 상처가 컸습니다. 옛날 고라 자손들은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내 음식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시 42:3). 3) 한계 상황에 다다른 것입니다. 욥이 당하는 고난은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의 한계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극심한 환난이라도 끝이 보이면 다시 반전되는 희망이 있지만 기약이 없는 상황이라고 할 때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은 주시지 않는다고 하였으나(고전 10:13) 시험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면서 사생결단하는 식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욥은 자기의 처지를 탄식하면서 생일을 저주하였습니다(욥 3:1). 욥 3:11에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라고 하며 그의 참담한 심정을 피력하였습니다. 3. 전화위복(轉禍爲福)을 이루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욥의 말년에 더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가축들은 잃어버린 것보다 배나 불어났고 자식들은 7남 3녀를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욥 42:12-15). 1) 기독교 복음의 특징입니다. 화(禍)가 복(福)이 되는 것은 기독교 복음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 부활의 영광으로 바뀌어졌습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시고 그의 이름을 높이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신 것입니다(빌 2:6-11). 구약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이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은 젊은 시절 파란만장한 생활을 통하여 훗날 애굽 총리의 높은 자리에 올라 전화위복의 증거가 되었습니다(창 50:20). 하만의 모략에 걸려 죽음의 위기를 맞았던 모르드개도 화가 복이 되는 삶의 표본이었습니다(에 8:15-17). 2)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였습니다(렘 33:3). 사도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롬 11:33). 지혜의 하나님께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크고 비밀한 일을 계획하실 때 사람들은 그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하나님’이라고 말을 합니다. 나의 괴로움을 저울에 달아보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고 말하던 욥은 뒤늦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기의 무지함을 고백하였습니다. 욥 42:3에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고 하였습니다. 3) 그리스도인의 신비로운 삶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어도 살고 영원히 사는 도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릇 자기의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눅 17:33)고 하신 이 역설적인 진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당장은 죽는 길이고 실패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오히려 사는 길이고 또한 성공의 비결이 됩니다. 요한복음 12:24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이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증거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고 때로는 연쇄적인 고난으로 얼룩져 있어도 그 과정을 통하여 거두어 지는 열매가 훗날 해와 달과 별과 같이 두고두고 밝은 빛을 발산하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15: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