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지성과 인격을 겸전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아는 신앙적 지식이 결여된 사람은 가치관에 혼란을 가져오곤 합니다.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에 대한 정확한 가치 기준이 없기 때문에 사리를 분별하는 것과 책임 있는 행동을 하는데도 자신감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그리스도인의 집단인 교회 안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옛날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바른 신앙이 있고, 또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를 체험 하였지만 그 신앙이 올바른 생활로 연결되지 못한 채 시험에 허덕이곤 하였습니다. 오히려 많은 지식과 은사의 체험들이 걸림돌로 작용하여 교회에 화평을 저해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들도 생겨났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추구해야 될 최상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인격이 성숙된 사람은 고상한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1. 자유로운 행동과 책임 의식
본문말씀 23절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책임 의식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1) 옳은 것과 유익한 것
건전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옳고 그름에 대한 바른 기준에 따라서 행동 하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자기의 개성과 소질을 살려 자기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자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희망하는 일이라도 그것이 올바르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이라고 한다면 이를 거부 하게 됩니다. 옳지 못한 일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상식입니다. 여기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은 옳고 정당한 일이라고 해서 반드시 유익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열심히 일을 해 놓고도 손익계산을 해 보았을 때 유익보다 손해가 더 많아지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2) 옳은 것과 덕을 세우는 것
본문 말씀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는 덕을 세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베드로후서 1:5에는 힘써 믿음위에 덕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합법적이고 정당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덕스럽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 덕(德)이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집을 세우다’(builds up)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마 16:18). 곧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도 덕이 없으면 결국 모래위에 성을 쌓는 것처럼 기초부터 무너져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적인 사람은 자기 기준에서 옳다는 것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덕이 될 수 있는가에 유의하여야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율법에 따라 돌로 쳐야 된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너의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였습니다(요 8:7).
3) 옳은 것과 양심적인 것
25절에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6:12에도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나의 양심에 관한 문제가 다른 사람에게서 제재를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본문말씀 29절에는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양심이 있지만, 사람마다 양심의 기준이 다릅니다. 따라서 자기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경우 이를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2. 하나님께서 가(可)하다고 여기시는 것
미가 6:8에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여기시는 것이 최상의 가치임을 일러줍니다.
1) 자기보다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
본문 24절에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33절에도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옳고 정당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거나 자기 한 사람만의 유익을 도모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자 일을 하지 않습니다(고전 13:5). 참으로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사람은 자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막 10:45).
2) 사람을 구원받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고자 계획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17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 양심의 자유와 권리를 내세우며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면 이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8:9에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 자기 양심에 가책되지 않는다고 무엇이나 거리낌 없이 먹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실족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경우를 두고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롬 14:15). 그 자신은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고전 8:13).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입니다.
본문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만드신 피조물을 통하여 영광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만 됩니다. 이사야 43:21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게 하신 것도 사실상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려는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6에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 최상의 행복
하나니은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는 사람에게 축복을 보장하였습니다. 시편 144:15에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1) 최고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그렇다면 무엇이 유익되고 어떤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인가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합니다. 결국 최상의 가치가 무엇이냐는 질문과 이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할 수 있는 것은 최고의 가치를 안다는 뜻이 됩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최상의 가치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1:7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지혜야 말로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잠언 3:14-15에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2) 그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 가운데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나, ‘좋은 진주’ 비유는 다 같이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소유 한다는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마 13:44-46).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고도 이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만다면 이는 마치 그림속의 떡을 보듯이 눈요기에 불가할 뿐 참 만족이나 행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이상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므로 모든 것을 다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관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모시고 어린아이처럼 행복해 하는 것이나,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통하여 생수의 시원함을 맛보며 참 행복을 느끼게 된 것도 같은 원리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은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며 봉사 하므로 누리게 되는 행복입니다(막 10:45).
3) 즐기며 사는 것입니다.
옛날 솔로몬 왕은 세상을 살고 간 모든 사람 가운데 행복하기로 말하면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전 2:25). 예수님께서도 “솔로몬의 모든 영광”을 세상 사람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마 6:29). 솔로몬은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최대한 즐기며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서 3:12-13에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고 하였습니다.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하여 자기 인생을 다 바쳐 수고를 하고도 자기가 소원하던 가나안에는 못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랑하였습니다(신 33:29). 사도 바울도 그런 인물입니다(딤후 4:7-8). 이와 같은 행복은 보이는 세상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즐기는 행복입니다(히 11:1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