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설교

장년
예람지기 2005.07.03 00:00:00
921
  • 일자
    2005-07-03
  • 설교
    손상률 목사
  • 성경
    열왕기상 22:13~28
 

본문 말씀은 아합 왕의 종말을 가져오게 할 전쟁의 기록입니다. 그는 남쪽 유대나라의 왕이자 그와는 사돈이 되는 여호사밧과 연합군을 조직하고 아람을 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왕이 군사를 모아 길르앗 라못 전쟁터로 나가기 직전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를 불러 모으고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는지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이때 아합 왕의 부름을 받고 나온 선지자가 무려 400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께서 그 전쟁을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왕상 22;6).
그렇지만 오직 한 사람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는 전혀 다른 예언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합 왕을 죽게 하려고 왕의 마음을 충동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거기 모인 400명의 선지자들은 모두 거짓말하는 영에게 감동되어 왕의 귀를 흐리게 하는 자들이라고 폭로하였습니다(22절). 한편 미가야는 왕의 부름을 받고 나오면서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고 하였습니다(14절).

 

 I. 선지자의 소임을 천명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싫어합니다. 아합 왕도 그의 권력에 아부하며 왕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선지자를 옆에 두고 있었습니다. 아합 왕의 부름을 받고 사마리아 광장에 나온 선지자는 400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똑같은 목소리를 내며 왕의 마음을 흡족케 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에 미가야를 부르러간 사환도 이 사실을 알려주면서 “선지자들의 말이 여출일구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컨대 당신의 말도 저희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13절). 여기 대한 미가야의 반응이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는 것입니다.

(1) 대세에 영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가야에게 권면하는 사환은 이미 먼저 와서 왕에게 예언한 400명의 선지자는 한 목소리를 내어 길한 예언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한두 명이 아니라 400명이나 되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같은 말을 했는데 그 중에 미가야 한사람이 다른 목소리를 내어본들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혼자서 외롭게 소리 질러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암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거기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선지자의 의중은 사람들의 욕구성향이나 인기에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 주고 마음을 같이 해 준다하여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면 그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진리 편에서 예수님의 길을 가는 사람은 외로운 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32).

(2)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명과 함께 엄청난 권세를 부여받게 됩니다(갈 1:1). 이 권세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신비로운 권세입니다(히 11:8). 그런데 때때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이 권세가 세상 권세 자들과 충돌하게 됩니다. 그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무신론적 통치자들과 폭군에 의해서 하나님의 권세가 무시당할 때 하나님의 종들과 그 백성들은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이럴 때 약삭빠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망각한 채 세상권력에 아부하며 거기에 힘입어 편한 길을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이와 같은 심리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유혹하곤 합니다. 마태복음 4:8-9에 보면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가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빌라도도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줄 알지 못하느냐”고 하며 타협하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다”고 하시며 이를 뿌리치셨습니다(요 19:10-11).
아합 왕의 부름을 받고 그에게 나아온 400명의 선지자들은 왕의 귀를 즐겁게 해주며 권력자와 함께 세상적 안일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3) 선지자의 길을 가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5:11-12).
예수님의 길을 가는 자 또는 선지자의 그 길을 가려는 자는 언제나 핍박과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4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야는 저를 부르러 간 사환이 힘들고 외로운 길을 가지 말고 앞서 말한 400명의 선지자들처럼 왕의 귀를 즐겁게 하며 편한 길을 가자고 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소임을 다하며 선지자의 길을 가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갈 1:10).


II. 계시에 대한 확신을 피력한 것입니다.

미가야는 먼저 와 있는 선지자들에게서 왕이 원하는 예언을 다 들었고 왕의 마음이 거기에 고무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권자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1) 계시와 환상의 지혜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보고 먼저 아는 자입니다. 선지자를 선견자(先見者)라고 하는 것은(삼상 9:9), ‘먼저 보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이 어린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고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습니다(렘 1:11). 그때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와 또 끓는 가마가 북쪽에서 기울어지는 것을 본다고 대답하였습니다(렘 1:11-13). 하나님께서 그 종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고 또 마음 눈을 밝혀 주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 알게 하십니다(엡 1:17-19).
그렇지만 때때로 선지자 중에는 그 보는 눈이 정확하지 못하거나 그 본 것을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여 행동을 그르치는 수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요1서 4:1).
여기 나오는 400명의 선지자들도 하늘의 환상과 계시를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그들이 받은 계시는 거짓 영들이 꾸민 거짓 계시였습니다. 22-23절에 보면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2) 언약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깨어 있는 성도는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영혼의 감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에게 있어서 영적인 감각이 둔하거나 계시의 분별력이 흐려지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든지 이해할 수 없으므로 혼란을 겪든지 낙심하게 됩니다(시 42:1-3).
아합 왕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여 선지자들에게 물어보았으나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예언을 해주었고 그것을 기쁨으로 받았다가 낭패를 당했습니다. 또 거기에 부화뇌동하던 400명 무리들은 신빙성이 없는 계시를 가지고 사실인 것처럼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계시의 확신도 없고 되어진 사실의 증빙도 없이 덩달아 열심만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미가야의 경우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고 더 큰 박해가 기다리고 있어도 여호와께서 제게 말씀하신 그 사실만큼은 너무나 확실하고 변개될 수 없는 것이기에 이를 증거하며 고수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난파선에서 절망하는 승객들에게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하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뢰성을 역설하였습니다(행 27:25).

(3) 진리파수의 의지를 천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신이 있고 또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그 내용을 전해야 되는 사명을 아는 사람은 어떤 난관이 있어도 이를 실천하고야 맙니다. 물론 아합 왕 같은 불신앙의 권력자가 버티고 있고 거기에 덩달아 춤을 추는 거짓 선지자의 무리들까지 힘을 합하고 나오게 되면 그에게 어떤 박해가 올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전의 의지를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해 주신 그대로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서 흩어졌다”고 말했습니다(17절). 그는 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라고 말했습니다(20절). 이어서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하고 낱낱이 밝혀 주었습니다(23절). 이에 노발대발한 아합 왕은 “이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로 먹이라 하라”고 하였습니다(27절).
어느 때나 진리를 파수하는 사람은 이를 수행하다가 감옥에 들어가는 일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시드기야 왕에 의하여 감옥에 갇혔고 또 시위대 뜰에 있는 구덩이에 던져지기도 하였습니다(렘 37:16, 38: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쇠기둥과 놋성벽이 되어 후세에 증거로 삼는다고 하였습니다(렘 1:18-19).

 

 III. 역사인식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리스도인은 올바른 사관(史觀)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역사는 도도히 흐르는 물과 같아서 임의대로 바꾸거나 역류시킬 수 없습니다. 신령한 안목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만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된다는 진리를 올바로 인식합니다. 미가야가 아합 왕의 권력과 다수의 세력에 맞서면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주장하는 이유도 유구한 역사의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1)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원리입니다.

옳고 그른 것의 판단은 사람의 숫자로 결정하거나 권력의 힘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때때로 인위적인 방법에 의하여 바른 것이 거짓에 짓눌리거나 비진리가 진리로 둔갑하는 경우가 있지만 결국은 참된 것과 거짓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맙니다. 역사는 사필귀정을 거울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미가야는 대세에 밀려 고생의 떡과 물을 먹을 수밖에 없었지만 주권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신뢰하며 지켜보았습니다. 그가 아합 왕의 명에 따라 부윤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려가 고생의 떡을 먹고 있는 동안 그의 입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곧 아합 왕이 아람 군사가 쏜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습니다(왕상 22:34-35). 그 순간 400명이나 되는 거짓 선지들이 예언한 말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동시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그것만을 증거한 미가야의 예언은 진리로 확인되었습니다.

(2) 순간보다 영원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파수하기 위하여 순간의 고난을 당했으나 결국 그는 말씀과 함께 영원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순간을 살기 위해 영원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영원히 살기 위해 한순간의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에서의 경우는 한순간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자자손손 영원히 누리게 될 장자권의 기업을 포기한 사람입니다(히 12:16-17).
한편 사도 바울의 경우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좋은 조건들을 순식간에 배설물처럼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했기 때문입니다(빌 3:8). 그는 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고후 4:17-18).

(3) 사람의 생애는 하나님 앞에서 평가됩니다.

히브리서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말씀하신 것처럼 죽는 것도, 심판 받는 것도 하나님만이 정하시는 주권입니다. 다만 인간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시간에 하나님께로 가야되는 것과 그리고 자기 삶의 실적을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는 다는 사실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한 일을 놓고 심판 하시는 기준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제시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6:27에는 각 사람의 행한 일을 가지고 심판한다고 하였습니다. 말라기 3:16에는 하나님 앞에 있는 기념책에 수록된 내용을 가지고 평가한다고 하였습니다. 삶의 목표를 오직 하나님께 두고 있는 사람은 미가야처럼 모든 일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에다 명줄을 걸고 사는 것입니다. 결국 그 말씀이 기준이 되어 자기 인생이 평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