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설교

장년
예람지기 2005.04.24 00:00:00
1029
  • 일자
    2005-04-24
  • 설교
    손상률 목사
  • 성경
    시편 42:1~5
 
인간은 자기의 불완전성과 한계상황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며 못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으나(요 14:12), 때때로 그와 정반대의 현실에 부딪치곤 합니다.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신앙과 현실의 괴리를 느끼게 될 때 적지 않은 혼란을 겪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신앙가나 영웅적인 일을 했던 사람 중 이와 같은 벽에 부딪혀 낙심하고 괴로워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본문 성경을 기록한 시인은 그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한 채 낙망하며 불안해한다고 토로하였습니다(5절).
성경학자들은 이 시편을 다윗의 글이라고 합니다. 개혁자 칼빈(Calvin)은 다윗이 사울의 박해를 받고 망명생활을 할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라 하고 그것을 왕궁에서 봉사하던 고라 자손 중에서 보관했을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 대한 독실한 믿음과 헌신을 했던 사람이지만 지금 당장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한 채 매우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사람들이 그를 향하여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하고 조롱하는 소리를 들을 때였습니다. 그때의 그 참담한 심정을 토로하여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고 하였고(3절), 또는 옛날을 기억하면서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4절).
이와 같은 일들은 다윗뿐만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낙망하고 불안하게 되는 경우와 그런 때에 일어나는 현상과 여기 신앙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나 결과를 생각하면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Ⅰ. 신자가 낙망하는 이유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처럼 패기 있게 힘찬 비상을 하는 자이며 낙망할 줄 모른다고 말합니다(사 40:31).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도, 성령받은 사람도, 은혜가 충만한 경험이 있는 사람도 낙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1) 세상의 악함 때문에 낙망합니다.
 
세상에는 어느 시대나 어떤 곳에서나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그렇지만 악이 득세하고 선이 짓밟히는 것을 볼 때 성도는 낙심하게 됩니다.
시편 73:1-3에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자기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며 사울 왕의 신하로서 진실된 마음으로 왕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그를 역적으로 몰아서 죽이려 하였고 이스라엘 전역으로 도망 다니는 다윗에게는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본문 성경 6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2) 자기의 무능을 알았을 때 낙망합니다.
 
여간 자신감이 있고 미래에 대한 비젼을 가진 사람도 너무나 두꺼운 현실의 벽과 거기 서 있는 자신의 무력함을 인식할 때 힘이 빠지고 좌절하게 됩니다. 불의 사자라 불리우는 엘리야는 아합 왕 앞에서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 사람입니다(왕상 17:1). 그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모아 놓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했으며 또 그들을 기손 시내로 끌고 가서 모두 죽여 버리기도 했습니다(왕상 18:40).
 
그러나 잠시 후 아합 왕과 이세벨의 폭정으로 하나님의 선지자가 모두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큰 실망과 좌절에 빠져 죽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열왕기상 19:10에 보면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속에 두 가지 사람이 있음을 실토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하고 탄식하였습니다(롬 7:24). 그것은 자기 안에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자기에 대한 실망에서 오는 탄식입니다.
 
(3) 하나님께서 외면하신다고 생각했을 때입니다.
 
원래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빈틈없이 살피시고 감찰하신다고 믿었습니다(시 139:1-4). 그는 평생동안 저를 살피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극심한 환난에 처하여 고통 중에 있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모르는 척 외면하신다 생각할 때 그는 낙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편 3:1-2에도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3절에도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하고 조롱한다고 말했습니다. 불신자들 보기에도 하나님이 그를 철저하게 외면하시고 그 기도를 들어 주지 않는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신자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40:27에는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고 했습니다.
 
 
Ⅱ. 낙망하게 될 때 어떻게 해야하는가?
 
신자가 어떤 이유로든지 낙망하게 된다는 것은 그 믿음이 중심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대체로 이럴 경우 욥의 아내처럼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거나(욥 2:9), 요나와 같이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를 가집니다(욘 4:9). 아니면 엘리야처럼 자포자기하며 죽음을 재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왕상 19:4).
그렇지만 믿음 있는 사람은 침착하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립니다. 본문 말씀 5절에는 낙망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은 언제나 시험을 당하는 성도에게 접근하면서 이때를 제일 좋은 기회로 삼아 흔들고 넘어뜨립니다.
 
(1) 세상을 보지 말아야 됩니다.
 
요한1서 2:16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실망했거나 신앙 생활에 갈등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아닌 다른 데로 눈을 돌리게 되면 더 큰 시험에 휘말리게 됩니다.

힘있는 권력자를 의지하려 하거나 재력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시편 146:3-4에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선은 잠시 도움을 준다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스스로 몰락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정으로 파고드는 시험을 물리치고자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향해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마 16:23).
 
(2) 자신을 보지 말아야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과신하고 있습니다. 세상 만사를 자기의 기준에서 바라보거나 판단하려 드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도 자기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평가 하곤 합니다.

예레미야 17:9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좋은 것은 무조건 선이고 제게 나쁜 것은 모두가 다 악인 것처럼 생각하는 자기 중심의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73편을 기록한 시인은 악인이 항상 평안하고 부요한 것을 보고 자기는 마음을 정결케 하고 손을 깨끗이 하여 무죄하게 살아온 것이 허무하다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잠시 후 악인 갑자기 몰락하는 것을 본 후 마음을 돌이켰습니다(시 73:17). 그리고는 자신을 가리켜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라고 하였습니다(시 73:21-22).
 
(3)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됩니다.
 
본문 말씀 5절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낙망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볼 수 있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 숨막히는 좌절과 낙망의 사건을 가지고 오히려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욥기 1:20-21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낙망이 은혜로 바뀌어 진다는 것입니다.
 
 ① 주의 뜻을 깨닫게 되는 은혜입니다.
 
시편 73:16-19에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 시인은 의인과 악인의 구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과 멀리 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편 73:27-28에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② 악이 선으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낙망할 만큼 큰 고난을 주시고는 그것으로 오히려 덕이 되게 하십니다. 극심한 환난의 밑바닥에서부터 최고의 영광으로 등극하게 된 요셉은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간증하였습니다(창 50:20). 낙망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는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선하신 목적을 성취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목을 늘어뜨리고 앉아 죽기를 구하던 엘리야도 그때부터 자기가 하여야 될 새로운 사명에 착수하였습니다. 곧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며,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자기 대신 선지자가 되게 하는 등 하나님 나라 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게 하였습니다(왕상 19:15-16). 하나님의 백성들은 낙망할 수밖에 없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주께서 베풀어주시는 진수성찬의 기름진 상(床)을 맛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시 23:4-5).
 
③ 믿음의 신비를 알게됩니다.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는 당시의 백성들이 신앙생활에서 낙망을 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말라기 3:14에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대하여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말 3:16).
 
하박국 선지도 성도가 낙망하는 것을 보고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하고 항의하였습니다(합 1:13).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습니다(합 2:3-4).
 
이와 같은 응답을 받은 하박국은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합 3: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