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선민의 역사는 철저하게 선택받은 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고 하였습니다(창 12:2). 그러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이르는 선민의 족보에는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도 구별된 사람들만이 그 이름이 수록되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계열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선택된 자와 버려진 자가 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22-23에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9:13에는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한날 한시에 태어난 쌍둥이 형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태에서부터 대립하였고 일평생 다른 길을 걸었으며 그 후손들까지 역사적으로 상극의 관계가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리브가의 배속에 있을 때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23절)고 하여 두 사람의 숙명적인 대립을 예언하였습니다.
Ⅰ. 가치관의 차이
에서와 야곱은 리브가의 몸에서 같이 나온 쌍둥이지만 그들의 성격이나 사고 방식과 추구하는 목적이 전혀 상반된 입장에 있었고 모든 일이 서로 대립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것은 저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 에서는 명예를 포기하고 물질을 선택하였습니다.
사냥군인 에서가 사냥 나갔다가 돌아와서 몹시 시장하였을 때 야곱은 집에서 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본문 말씀 30절에는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에돔」이라는 말은 '붉다'는 뜻입니다. 그 때 야곱은 에서에게 “형의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라”고 하였습니다(31절). 그 말을 들은 에서는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무엇이 유익하리요”하고 쉽게 허락하였습니다. 그는 배가 고프고 육체가 곤비하였을 때 그 고비를 못 넘기며 장자의 명분을 내어주었습니다. 34절에 보면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에서는 조상 때부터 전해 받은 장자의 명분과 그 가치를 몰랐습니다. 잠시 배가 고프고 곤비해질 때 팥죽 한 그릇과 바꾸어 버릴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16에는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2) 야곱은 장자권의 축복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에서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볍게 여긴 그 장자의 명분을 야곱은 가장 가치 있고 귀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획득하고자 한데는 그의 인생을 걸고 싸웠던 처절함이 있습니다.
처음은 리브가의 배속에서 에서를 밀치고 먼저 나오려 하였으나 거기서 뒤지게 되자 앞서 가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따라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야곱(붙잡는 자)이라 불려졌습니다(26절). 두 번째는 허기진 형에게 팥죽을 주면서 장자의 명분을 제게 양도하도록 맹세를 시켰습니다(33절). 세 번째는 그의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권의 축복이 넘어가려는 순간 형을 가장하고 들어가서 아비를 속인 채 축복을 가로챈 것입니다(창 27:18-19).
한편 이삭은 야곱에게 속은 채 그를 에서인줄 알고 마음껏 축복을 선언하였습니다. 이토록 집요하게 장자의 명분을 붙들려고 했던 야곱은 그 방법이 비열하고 도덕적이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쟁취하려는 집념이 있었습니다.
Ⅱ. 생활양식의 차이
사도 바울은 세상을 사는 사람들을 두 가지 생활양식으로 분류하였습니다. 하나는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부끄러움을 영광스럽게 여기며 땅의 일만 추구하다가 멸망으로 끝나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늘 나라의 시민권 자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 하는 사람입니다(빌 3:18-21). 시편 1편에는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삶이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생활양식은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서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1) 에서는 자기의 완력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27절에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그들의 성격과 직업과 살아가는 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에서의 경우 그의 야성적인 기질에 따라 들에 나가서 동물을 사냥하는 등 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훗날 그의 아버지 이삭이 축복할 때도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고 하였습니다(창 27:39-40).
이와 같은 이삭의 예언은 에서에게 있어서 축복이라기 보다 오히려 저주의 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은택과 풍요로움을 말하지만 에서의 삶은 그런 은혜와 거리를 멀리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칼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전쟁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곧 자기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남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는 뜻입니다. 에서와 그 후손에게 지워진 숙명적인 불행은 그가 숨을 거둘 때에야 모든 멍에에서부터 풀려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자기의 힘만 의지하고 살아야되는 인생의 불행을 예언한 것입니다.
(2)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창세기 27:28-29에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살았습니다. 하늘의 이슬과 땅에 기름짐이란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신령한 은혜와 세상에서 가꾸는 노력에 대한 열매를 의미합니다. 또한 그의 혈통에서 열왕이 나고 그들이 여러 형제의 주가 되어 세상을 통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복의 기관이 되어 그를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도록 하나님께서 배려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악마가 들끓는 죄악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눈동자같이 보호하시며 암탉이 날개 아래 새끼를 품는 것같이 지키신다고 하였습니다(신 32:10).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과 은혜를 받는 성도들에 대하여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9).
Ⅲ. 나타난 결과의 차이
오늘날 중동의 역사를 에서의 후손과 야곱의 후손 곧 두 국민 사이의 대결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이 복중에 있을 때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미 그 후손들에게 미칠 운명적인 결과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1) 에서는 문제의 민족으로 전락했습니다.
두 국민간의 대결은 결국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겨야되는 하나님의 결정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아비 이삭은 모든 복을 큰아들인 에서에게 부어주려 하였지만 결국 야곱을 높여주고 에서로 하여금 아우를 섬기는 사람이 되도록 선언하고 말았습니다(창 27:40). 이 일 후에 에서는 야곱에게 복수심을 가졌고 야곱은 형의 낯을 피하여 밧단 아람으로 도망을 갔으나 훗날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3:12에 보면 에서는 야곱의 식솔들을 보면서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하고 섬김을 자처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대로 이루어지는 결과입니다. 솔로몬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였습니다(잠 16:9).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아 에서의 후손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뜻을 거스리고 여기에 반하는 일을 많이 해왔습니다.
그것은 결국 두 민족 간에 분열과 대립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로 이어졌습니다. 말라기 1:2-3에 보면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4절에는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찌라도 나는 헐리라”고 하였습니다.
(2) 야곱은 예수님의 조상으로 축복의 기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하였는데 이 말속에서 선택과 유기(遺棄)에 관한 도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3-6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엡 1:6). 곧 하나님의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수한 신분을 부여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과 모든 신비로운 은사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 그의 생애를 통하여 또는 그 후손들의 역사를 통하여 수없이 많은 수난과 역경이 있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셨고 그들에게 은혜와 복을 주셨습니다. 신명기 7:6-9에 보면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을 지켜 지상만민 중에서 축복의 증거로 삼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약속은 지나온 과거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후손들에게까지도 지켜지는 변함 없는 언약입니다. 시편 144:15에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