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량 목회자(Tentmaking Pastors)
자비량 목회자(Tentmaking Pastors)에 대한 단상
직장사역연구소 방선기 목사
누구든 한국에서는 목사가 되기로 결정하는 순간 세상에서 하던 일은 다 포기한다. 목회에 전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결단을 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서 목회를 하려고 하는데 목회지가 없을 때가 있다. 혹 목회지가 있더라도 그곳의 목회를 통해서 경제적인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에 목회자들은 현실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주님은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목회자가 되어서 먹고 마시는 문제로 염려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마6:31-32) 그러나 주님은 자기 가정을 경제적으로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불신자보다 악하다고 했다.(딤전5:8) 그러니 적어도 경제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 목회지가 없거나 미자립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들이 겪는 딜렘마이다. 이런 딜렘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세가지이다. 첫째는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둘째는 일하는 것이다. 셋째는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다. 지금까지 도움을 청하는 것이 유일한 길로 생각했다.
그러나 두 번째 길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 길에 대해서 문제가 많이 있다. 언젠가 신학교 학생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교수 중에 한 사람이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이 먹고 살겠다고 택시 운전이나 한다” 면서 택시 운전하는 목사를 비난했다는 것이다. 그 분의 의도가 택시 운전하느라고 목회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책망한 것이라면 그런대로 받아줄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인 필요 때문에 택시 운전하는 것 자체를 정죄하는 것이라면 어떤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 묻고 싶다.
목회자는 목회에 전념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정의 가정으로 경제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사도바울은 가정의 경제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경제적인 책임을 위해서 텐트를 만드는 일을 했다. 아마도 앞서 말했던 그 교수가 텐트만드는 바울을 보고는 “사도로 부름받은 사람이 돈 좀 벌어보겠다고 텐트나 만들고 있다”고 비난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사도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위해 부름을 입은 사도로서 그 일에 평생을 헌신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텐트를 만드는 일을 꾸준히 성실하게 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살전2:9)” 그는 실제로 빌립보 교회를 비롯해서 여러 교회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다. 아마도 텐트 만드는 일 따위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얼마든지 안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일을 했다.
리전트 신학교의 고든 피(Gordon Fee) 교수는 그 당시 헬라의 철학자들이 경제적인 필요를 채운 방법을 크게 네가지로 소개했다. 가장 선호하는 것은 귀족들의 후원을 받는 것이지만 소수에게만 혜택이 주어졌다. 그 다음으로는 여러 사람들의 후원을 받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구걸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동을 통해서 돈을 버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당시 철학자들은 구걸을 하는 한이 있어도 노동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헬라철학자들에게 노동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바울은 헬라 철학자와 달리 노동을 한 것이다. 아마도 이런 바울의 처신은 헬라 사회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 데는 이런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런 오해를 받아가면서도 바울이 텐트를 만드는 일을 한 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엄청난 교훈이 된다. 사도바울에게는 텐트를 만드는 일은 물론 노예들이 주인을 위해서 하는 온갖 노동들이 결코 무가치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 자체를 주님이 부탁하신 일로 받기만 한다면 주의 일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노예들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고 했다.
이제 현재의 상황으로 돌아오자. 여기 목회자가 있다. 목회를 시작했지만 성도들이 많지 않다. 그들의 헌금으로는 목회자로서 경제생활을 할 수가 없다. 그럴 때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 자신이 일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상황인데도 일하지 않고 도움만 기다린다면 그것은 적어도 사도바울의 눈으로 볼 때는 무책임한 것이다. 그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로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려 선한 일을 하라.(엡4:28)” 또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는 좀더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q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4:11-12)” 그리고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그런 권면이 목회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사도바울이 지금 우리 나라에 와서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목회자를 보고 무어라고 권면할지 상상을 해보라.
사실 지금도 이미 많은 목회자들이 경제적인 필요 때문에 흔히 말하는 세속적인 직업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항상 마음에 부담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택시 기사로 일하는 목회자들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자기가 택시 기사 일하는 것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택시 기사라는 직업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목회자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떳떳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 분을 위해서 안타까운 일이며 한국교회 전체를 볼 때도 답답한 일이다.
물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교회나 목회자가 속해있는 교단이 이런 목회자들의 경제적인 필요를 다 채워주어서 걱정없이 목회를 할 수 있다면 더할 수 없이 좋다. 그러나 그런 형편이 아닌데 경제적인 활동을 하는 목회자를 향해서 비난을 하거나 죄책감을 갖게 하는 것은 혹시 잘못된 신학으로 인해 사람들을 괴롭히는 죄를 짓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자비량 목회자(Tentmaking Pastor)에 대한 신학적인 연구의 필요를 느낀다. 현실적으로 목회자로 안수받은 사람으로서 세속적인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현실이 신학의 내용을 결정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런 현실이 있는데 단순히 교회의 전통이나 한국교회의 정서만으로 그것을 부정하거나 비판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 문제를 신학적인 이슈로 삼았으면 좋겠다. 이미 자비량 선교사(Tentmaking Missionaries)는 보편적으로 인정이 되어 왔다. 자비량 선교사에 대해서 더 이상 신학적인 논란이 없다. 그런데 왜 자비량 목사는 인정이 안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자비량 선교사의 신학과 연계해서 신학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기존의 자비량 목회자들의 모임의 필요를 느낀다. (개인적으로 '자비량 목회자 협의회(Tentmaking Pastors Association:TPA)라는 모임이 곧 탄생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세속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목회를 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통해서 이런 상황에 대한 신학적인 원칙도 수립하고 현실적인 문제도 함께 풀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런 모임을 주장하면서도 어려움을 느낀다. 아이러니칼하게도 화이트 칼러 직업을 가진 목회자들은 그런대로 인정을 받는다. 변호사나 교수, 의사나 기자 등의 직업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 분들도 이제는 꽤 많이 있다. 그러나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분들은 목회자로서 일한다는 자책감에다가 그 일자체가 사회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이제 이런 분들을 얽어매고 있는 잘못된 신학을 정리해서 자유롭게 해줄 필요가 있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정리가 되어도 현실 문제가 남아있다. 목회자들 중에 과거에 직업이나 전문기술이 있던 사람들은 다시 그 직업에 종사할 여지가 있지만 신학공부만 했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할만한 일을 찾을 수가 없다. 농촌에서는 목회자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도시에서는 정말 일자리를 찾기가 어렵다. 일반 실직자들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데 목회자들이라고 해서 다를 리가 없다. 현실적으로는 많은 목회자들이 택시기사를 한다고 한다. 그들의 형편을 보면 개인택시를 하는 경우는 그런대로 목회와 병행할 수 있지만 일반 택시 기사의 경우는 목회와 병행하기는 무척 힘이 든다고 한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크리스쳔 기업인들이 그런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한 사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잉크천국’이라는 기업을 경영하는 분이 사무기기에 잉크 충전을 하는 일을 목회자들에게 소개해서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문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로서 땀 흘려 수고 한만큼 경제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고,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사업들이 생겨나고 목회자들에게 소개가 된다면 자비량 목회가 새로운 목회의 대안적인 파라다임으로 자리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선교사 사도바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