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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미 2002.06.07 01:5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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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의 한 호텔 커피샵에서 만난 1.5세 가수 유승준(26)의 첫 인상은 ‘생각보다 솔직하고 외모가 단정함’이었다.

“시민권 취득과 군대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전제조건을 제외하고는 초기 미국에서의 학교생활, 사춘기, 탈선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까지의 신앙적 체험을 매우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았다. 한국에서의 ‘오빠부대’를 이끌던 인기 댄스가수 유승준에서 지금의 미주 장애인선교단체 ‘밀알’의 홍보대사 유승준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한없이 길었던 그의 26년 삶을 들어 보았다.

유승준의 고향은 서울. 미국 세리토스로 가족 이민 온 것은 중학교 1학년때(89년). 가족은 부모와 1살위의 형.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미국와서 받은 첫 고통이자 마음의 상처는 영어를 못해 ESL반에 들어가야 한다는 처지였던 것 같습니다.” 성숙치못한 또래 집단인 학교내에서 흔히 그렇듯이 영어를 못하는 ESL반이란 특수성은 언어문제가 없는 기득권( ) 아이들에겐 조롱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던 것.

“그땐 왜 그렇게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는지 모르겠어요. 아침이 오는 것이 악몽이었지요.” 1살위인 형에게 하소연을 했으나 형자신도 같은 처지로 힘든 상태였기때문에 동생을 도울 힘이 없었고 부모님에게 ‘저 학교가기 싫어요. 아이들이 저를 영어못한다고 왕따시켜요.’하고 S.O.S를 청해 보았지만 대부분의 한인 이민부모처럼 아들의 하소연을 들어 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던 것.

그러던 중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ESL반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있는데 흑인 아이들이 몰려와 공을 담너머 차버리며 ‘한국으로 돌아가 버려’라고 야유했고 패싸움이 벌어졌다. 한국서 태권도를 잘했기때문에 흑인 아이를 몇대 쳤다.

결국 교장실에 불려갔고 그때도 ‘영어 잘하는’ 흑인 아이들이 상황설명을 유리하게 했다. 정당방위라고 설명을 해보았지만 ‘모자라는 영어’ 인지라 5일 정학을 받았다. 부모님도 자신만을 나무랬다. “그때 누군가 나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며 한마디라도 어떻게 하라고 했다면 그렇게까지 빗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유승준은 지금 말한다.

“대부분 갱이라하면 난폭하고 성격도 강한 줄 아는데 사실은 저처럼 이민초기 친구들의 놀림속에서 혼자 견딜 힘이 없는 겁많은 아이들이 택하는 길이지요.” 겁많은 유승준도 당시 상황에서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었던 자신의 ‘보호막’을 갱가입이라는 탈선의 길을 택함으로써 찾았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귀를 뚫고 바지를 갱스타일의 폭넓은 힙합 패션으로 변신했다. 외모부터 ‘튀’어야 외부침입을 막을 수 있기때문.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어려서부터 익힌 태권도가 있어 갱에서도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내키지 않으면 주먹과 발을 올려 부쳤다. 그 결과 고등학교를 6곳 옮겨 다녔다.

“주니어하이때 ABC디스트릭에서 쫓겨난 다음 가(Gahr), 아티시아, 세리토스, 라 미라다, 서니힐스를 전전하다 엘 카미노고교에서 졸업을 하게 됐다.

“엄밀히 졸업을 한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는 19살이 되면 자동적으로 학교를 그만 다녀야 하기때문에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졸업할 때까지 이수한 학점이 9학년 정도까지였기때문에 나머지 3학년 분의 학점은 ‘인디펜턴트 스터디’로 집에서 숙제를 해감으로써 학점을 이수받아야 했다.

결국 고등학교 졸업장은 한국서 인기가수로 ‘뜬’ 다음인 21살때 받은 셈. 물론 당시 아예 대학을 포기했기때문에 SAT는 보지도 않았다.

“사실 저의 부모님은 제가 이런 사실을 말하는 것 자체도 탐탁치 않아 하세요. 그러나 지금 한국서 갓와 저와 같은 상황을 당하는 동생들이 있을 텐데 그들에게 절대로 저처럼 당시를 도피하기 위해 탈선하지 말라는 것을 전하고 싶어서 입니다. 영어나 놀림이나 왕따는 시간이 지나면 극복되는 문제니까요.”

그에게 고등학교 4년동안은 길지 않은 그의 인생의 최대의 위기이자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심심하면 가출, 학교 ‘땡땡이’도 밥먹듯 했다. 술, 담배, 마약, 폭력…또래 갱멤버들이 하는대로 자신을 서서히 ‘망가뜨려갔다’.

그러나 이런 탈선에도 점점 싫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갱들과 어울리면서도 제 마음속에는 항상 ‘나는 결코 이런 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저 잠시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까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이 되자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절망감이 왔고 세상에 자신이 없어져 자살할 생각을 품고 있을 때였지요.”

멤버 몇이 평소 잘알고 지낸다는 여자 점장이 집에 자신을 데리고 갔다.

집에 들어가니 2~3살 쯤 보이는 아이가 무언가 갖고 놀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마약하는 도구였다. 당시 그 역시 마약으로 당시 체중이 115파운드정도 밖에 되지 않은 상태로 얼마나 몸을 갉아 먹는 것인지 알고 있던 터였다.(지금은 175센티에 175파운드).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갑자기 그곳과 그곳에 있는 점장이와 평소 동지였던 멤버들이 ‘사탄’ 혹은 ‘검은 무엇’으로 느껴지면서 공포심이 압도했다. 자신도 모르게 교회도 안다니던 그가 기도를 했다. “너무 무서우니 제발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순간 환시인지 상상인지는 모르지만 점장이가 앉아 있던 뒷 창문이 활짝 열리는 듯하며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환한 빛이 방안으로 비쳐 들어왔 자신위에 닿았다. 그리고 “내 아들아, 나는 이미 여러차례 너에게 돌아오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너는 듣지 않았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어서 일어나 그곳을 나와라”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무서움이 사라지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이런 짓들은 사탄이 하는 것이니 모두 이곳을 빠져 나가자. 정신들 차려라”고 외친다음 그곳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이때가 19살. 오랜 가출과 방황속에서 돌아온 것. “솔직히 제가 점장이 집에서 경험한 것이 무엇인지 지금도 잘 몰라요.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밝은 세계와 정반대로 2살된 아이에게 마약을 시키려는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악한세계를 그곳에서 강하게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시 세례도 받지 않았던 그에게 무섭고 어두운 공포의 ‘악의 세계’를 먼저 경험케함으로써 하나님의 힘을 역설적으로 체험케 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집에 돌아온 그는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교회에 나갔다. “돌아와 보니 부모님이 착실한 신자가 되어 있었어요. 제가 방황하지 않았다면 두분은 결코 교회에 나가지 않았을 거에요.(웃음)” 못다한 졸업학점을 따기로 결심, 집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또 뭔가 ‘할일’을 찾았는데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이 태권도밖에 없었다. 근처 도장을 찾아가 실력을 보여줬더니 ‘아르바이트’로 가리치라고 했다. 그래도 뭔가 좀 더 잘할 수 있는 ‘자신의 일’을 하고 싶었다. 부모님의 의견에 따라 6개월동안 새벽기도에 갔다. 결과 “하나님, 제게 가수가 되는 길을 열어주세요”하는 기도를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려서부터 춤과 음악을 좋아했고 또 잘했어요. 사실 미국와서도 밤에 거라지에 나가 음악을 틀어놓고 춤으로 스트레스를 풀곤 했지요.”

그러나 동양인으로서 가수로 성공하기가 미국에서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기때문에 한국 프로덕션사에 데모 테입을 3곳에 보냈다. 그 중 한곳에서 긍정적 연락이 왔고 드디어 가수가 되려고 한국에 갔다. 그때가 96년. 집으로 돌아온후 1년만이었다. 그리고 한국에 간지 1년만인 97년 ‘가요탑 10’에서 ‘가위’로 1등을 했다.

“그때 처음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고 신앙고백을 했어요. 전 사실 새벽기도때 가수가 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켰던 것이지요.”

인기정상에서 불어닥친 시민권과 군입대관련 소용돌이속에서 지금은 정서적으로 안정이 됐다는 그는 언젠가 한국에 들어가 모든 것을 밝힐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서 2000년에 장애인 시인 송명희씨와 인연이 되어 ‘밀알’ 홍보대사가 됐고 이젠 이곳 미국에서 ‘밀알’과 함께 일해볼 생각입니다.”

그 어느때보다도 지금 ‘하나님과 가깝게 지낸다’는 그는 5월 ‘밀알’에서 하는 미전국과 콰테말라 자선순회 공연 준비로 여념이 없단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팬들이 방청객에서 환호할 때마다 저는 속으로 ‘하나님, 저 환호를 당신 영광으로 돌립니다’고 기도했어요. 하나님만이 저의 잘잘못을 아시지요. 잘못이 없다면 언젠가 한국에 가서 모든 것을 밝힐 기회 역시 마련해 주시리라 믿고 있어요. 최악의 방탕속에서 구해주신 분이니까요.”



중앙일보 김인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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