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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호>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나는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흔히 말하기를 6.25 전쟁(한국 전쟁)때 한국이 통일되지 못한 이유는
중공군의 개입,그리고 원폭투하에 대한 트루만의 적절치 못한 판단,
또는 장기화된 전쟁에 따른 열강들의 타협결의나 국내 정치의 혼란등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님께서 살아 생전에 말씀하셨던 이유를 지지합니다.
김용기 장로님의 지론은 국군이나 U.N군의 도덕성 때문에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장로님은 국군이나 U.N군이 북진하면서 공산군과 동일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뚜렷한 이유없이 양민을 학살하기도 했고 또 부녀자를 강간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김용기 장로님은 말씀하시길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국 이러한 도덕성의 결여로 통일이 저해하고 또 다시 둘로 나뉘는 아픔을 야기 했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이 들어면 너무도 터무니 없다며 웃을 이 지론을 가장 근거있는 이유로 지지하는 것은
이와같은 사실이 역사속에서 너무도 많이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갈림길을 찾아 조금만 깊이 살펴보아도 여지 없이 도덕성의 문제가 바로
역사의 명암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저 유명한 워털루전투에서 웰링턴과 나폴레옹의 명암을 나눈것도 도덕성에 대한 의지였습니다.
웰링턴은 나폴레옹과의 전투시에 군사들에게 백성들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부녀자를 강간하는 행위를 절대 금지 시켰습니다.
그러나 다국적군인 웰링턴의 군대에서 이와 같은 명령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특히 스페인 군인들은 이와같은 만행은 쉽게 자행해 버렸습니다.
결국 웰링턴은 한사람의 병사가 아쉬운 때에 사만이나 되는 스페인 군대를 자국으로 돌려보냈고
이로 말미암아 그는 한때 심각한 위기에 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웰링턴의 군대는 이러한 규율로 말미암아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게 되었고
이 결과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던 나폴레옹이 재기할수 있는
모든 발판을 허무는 결정적인 기초가 됩니다.
심지어 프랑스 진군시 나폴레옹을 열렬히 지지했던 프랑스 국민들까지도 웰링턴의 군대에
자진해서 찾아와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해 줄것을 부탁했다고 하니까요.

오늘날 중국과 대만의 결과도 도덕성에 의한 결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택동의 공산군과 장개석의 국민군은 애시당초 그 규모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군대였습니다.
장개석이 특별한 경계없이 국.공합작을 승인할 정도로 당시 공산군은 국민군에 비해
너무도 보잘것 없이 궁지에 몰릴데로 몰린 군대였습니다.
그러나 국민군은 도덕성의 결여로 갈수록 민심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할수만 있다면 백성들의 재산을 착취했고 인권을 유린했습니다.
그러나 공산군은 그렇지 않았습니다.그들은 백성들의 재산과 인권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물론 모택동의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지만 그 결과는 단시간내에 너무도 엄청나게 드러났습니다.
얼마못가서 장개석은 그 엄청난 군대와 그 넓은 대륙의 통치권을 모택동에게 넘기고
가슴을 치며 대만으로 쫓겨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역사적인 장면을 보며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냥 모두가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지도자들은 앞으로 통일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특별히 경재적 교류가 중요하다며
우리 국민 모두가 통일에 대한 재정적 분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저는 이보다도 더 중요한 통일의 열쇠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말했던 도덕성 회복입니다.
지금 남과 북의 도덕에 대한 의식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남한의 도덕 불감증은 북한의 그것에 비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 입니다.
저는 지금 북한이 상당히 도덕적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사는곳 치고 죄악이 관영하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도덕을 운운해도 감히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비견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웰링턴이나 모택동의 군대가 도덕적 규율이 있었다 해도 분명한 한계가 있는 도덕성인 것입니다.

제가 위에서 말하는 도덕의 차이는 사람들의 의식에 관해 말하는 것입니다.
도둑들이 모인 소굴에 가면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완벽하게 훔치는 지를 자랑하고
강도들의 소굴에 가면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자랑하고
창녀들의 소굴에 가면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음란한가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또 남자들은 군복만 입으면 말하는 내용이나 행동들이 달라집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예비군 훈련만 가면 음란한 말들을 앞다투어 지꺼리고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립니다. 바로 도덕에 대한 의식이 결여된 것입니다.

스페인 군대나 국민군은 바로 이 의식이 결여된 군대였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와중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쾌락을 즐기지 못하면 그것을 멍청한짓 이라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국민들속에 편만한 의식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럴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고 '못하는 놈이 멍청이지' 라고 생각하는 제목은 무엇입니까?
연일 터지는 사회 지도부나 돈있는 사람들의 도덕 불감이 혹시 대다수 국민들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다만 능력이나 돈이 없어서 잠잠할 뿐이지...

그동안 북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의해 세뇌되어 왔다면 남한사람은 돈에 의해 세뇌되어 왔습니다.
돈은 인본주의와 맞물려 상상할수 없는 도덕불감증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통일의 갈림길에서 우리에게 돌이킬수 없는 후회의 제목이 될 것입니다.
일부 몰직하한 인간들이 중국의 조선족들에게 저질렀던 추태가 그들의 가슴에 어떤 벽을 쌓았는지
우리는 이미 보았지 않습니까?
경재적 힘이 아니라, 경재적 힘에 의해서 무너진 도덕의 회복이 통일의 열쇠인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들이 깨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 역시 도덕 불감의 사각지대는 아니지만 아직도 교회에 대한 의식은 도덕적이지 않습니까?
교인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어떻게 교회다니는 사람이 그럴수가' 라는 말을 듣지 않습니까?
이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또한 희망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 역시도 그리스도인의 범죄에 유별나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도 그리스도인 이라면
도덕적으로 살는 것이 마땅하다는 인식이 있다는 증거이며 도덕에 대한 의식전환의 열쇠가
이땅의 교회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이땅의 죄성을 바꿀수 있다는 역설적인 도전이기도 합니다.
지금 북한의 탈북자들 사이에는'살기 위해서는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가라'는 말이
퍼지고 있다 합니다. 심지어 탈북자를 가장한 북한의 정보원이 자신을 돌보는 중국의 지하교회
성도들의 사랑에 감동해서 자신이 정보원임을 밝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일까지 있었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또 한차례 중대한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후 한 선각자가 있어 이때를 회상하며 "그당시 우리민족은 결정적인 통일의 기회를
맞았으나 통일은 물건너 가버렸다. 흔히 그 이유로 주위 열강들의 은근한 견재,
그리고 경재적 협력의 실패나 정치적.사상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하지만
사실 결정적인 이유는 남한 국민들 사이에 만연한 도덕 불감증 때문이다.
그들의 이기적이고 쾌락적인 의식은 북한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했고 도리어 그들의 마음에
씻을수 없는 상처만 안겨주었다. 그들은 돈 되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남남북녀'라는 말을 외치며 북한의 부녀자를 돈으로 유혹해 그들의 몸과 마음을 유린해서
다시는 허물수 없는 담을 만들어 버렸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이땅의 역사적 명암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정치력은 거룩이며 하나님 나라의 경재력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땅의 교회는 지금 다시한번 깨어나야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이 땅에 만연한 죄악의 제목을 안고 우리가 먼저 눈물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고
이 땅에서 당연시 되고 있는 죄악의 제목을 부끄러운 제목으로 전환 시켜야 하며
나아가 경재적 가치속에 고착화된 죄악의 질서를 고쳐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통일의 열쇠이며 이러한 운동이 없는 통일에의 몸부림은 결국 겉치레일 뿐입니다.

당신은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나는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회개에 대한 긴박한 도전이 밀려오지 않으시던지요?
두 정상의 만남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며 또한 교회를 향한 도전입니다.

중심으로 고대합니다.
길선주 목사의 회개를 시작으로 1917년 평양에서 일어났던 부흥의 물결이 가까운 시간안에
평양에서 우리의 회개를 시작으로 다시한번 일어나기를...


흩어지는 공동체를 꿈꾸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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