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아니 우리 인류의 역사이겠지요.
아담은 그 순수성을 잃어 버렸고
그의 아들은, 그것도 장남이 대번 살인자로 변모하였으며
결국 모든 사람의 생각과 계획이 악하여 물로 멸망이 되었습니다.
그다음? 똑같았습니다. 노아의 실수, 바벨탑 등
그래서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다시 소망으로 등장했습니다.
무조건적인 은혜로. 그 자손에 희망을 걸었지만 그것도 마찬가지
그래도 히브리인은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의 때를 준비했습니다(롬3)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으로 등장하셨고 그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세대가 교회의 역사지요.
성령체험을 한 세대가 먼저 부딪친 문제가 율법문제였습니다.
차라리 역동적인 역사는 사도그룹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이루어 졌고 교회의 대표인 예루살렘 교회보다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발전 하였으며 역사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다음은 로마, 다음은 유럽 등 교회 역사의 주체는 다른 지역으로 넘어 갔습니다. 유럽에 왔을 때 교회의 정체현상은 극심했습니다. 교황제도는 교회를 귀족정치, 계급정치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에 반발하여 일어난 운동이 수도원 운동입니다.
지금의 선교단체의 위치를 이때 비유한다면 이 수도원운동과 같다고 할 수 있죠. 수도원은 때로는 청빈으로 때로는 순수 학문으로 그 길을 같고 프란시스 같은 사람은 그 영향력을 가장 강하게 미친 사람 중에 하나이지요. 또 선교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켈트 수도원은 아일랜드와 영국을 복음화 시켰으니까요.
그러나 아쉽게 이 운동도 조직화 되면서 타락하기 시작하였고 천주교와 같은 흐름에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 흐름에 정면 반대한 사람이 루터지요.
루터는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형식이나 공덕사상이 구원을 이루지 못함을 성경을 통하여 알고 오직 의인을 믿음으로 살리라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제도에서 추방당한 루터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칼빈이라는 사람이 그 영향을 가장 잘 정리한 사람이지요. 너무 개인적이지도 너무 무조직적이지 않는 칼빈주의는 장로교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 사상이 지금 우리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왜 쓰냐구요(그동안 읽느라 수고!)
사도교회>이방인교회
천주교>수도원운동
수도원운동>개혁교회(장로교회)
이런 흐름이 왜 왔는지 느끼십니까?
이것은 모두 기존 세력의 경직됨에서 변화를 시도한 몸짓입니다.
기존 교회가 모순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만 하지요.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교단체의 운동은요? 저는 같은 싸이클을 겪을 것이라 봅니다. 벌써 유비에프같은 단체는 교회화되어 조직화 되고 외국에서 조차 한 교단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용을 강조하셨고 예루살렘교회는 조직화되면서 형식화 되었으며 다시 수도원운동은 내용을 강조, 또 형식화, 개혁은 내용을 강조, 또 조직화 형식화, 선교단체 탄생 내용강조 . . .
언제까지 이런 일을 반복할까요.
우리의 참된 신앙의 현주소는 어디일까요
한 번 생각해 보시고 이야기를 나눕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