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자존심, 솔내교회
외국인의 보조 없이 한국인 스스로의 힘으로 건축.
한국에서 최초로 건립된 교회가 바로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소재한 솔내교회이다. 총신대학 용인캠퍼스에 가면 한국인 최초로 건립한 솔내교회를 다시 복원시켜놓아 솔내교회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솔내는 한자어로 하면 송천(松川)이 되기도 하는데 '숨겨진 한국 교회사'를 집필한 김대인 목사는 송천은 松泉이었다고 설명한다.
"불타산맥의 허리 부분에 속하는 소래의 뒷산에는 송림이 빽빽히 들어차 있고 마을 곳곳에서는 맑은 물이 넘쳐 흐르는 샘들이 있다. 이 샘들은 칠년 대한(七年大旱)에도 마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솔내음, 옹달샘 솟아 오르는 전원적인 이름이 어떻게 해서 솔샘이 아닌 솔내로 바뀌었을까? 이는 순전히 일제의 간지에서 비롯한다. 명목상으로는 솔샘보다는 솔내가 표기상 편하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였다. 솔내는 전형적인 한국 농촌 마을이었다. 동해안에는 수 백년 묵은 당나무가 흉물스럽게 서 있고 당나무 중간에는 구멍까지 뚫려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봄 가을로 이 당나무를 신목으로 섬겼는데 당굴레를 사서 걸판지게 굿판을 벌렸다. 또 무지한 주민들은 당나무 속에는 백년 묵은 구렁이가 살고 있어 섬김을 받는다고 믿고 삼 년마다 한 사람의 처녀를 제물로 바쳤는데 구렁이는 처녀를 휘감고 가지고 놀며 피를 빨아먹고는 그 육체는 당나무 밖으로 토해 내친다고 했다. 무운(巫雲) 가득한 이 동리에 어떤 경로를 통해 예수가 받아들여졌는가?
양계성은 그의 실명 소설 『소래 사람들』에서 장연골의 농촌 지도자 안민이 농민숙을 경영하며 과학적인 영농법과 함께 덴마크의 지도자 그룬투비의 삼애운동을 전파하므로 와진 영향이었다고 지적한다.
안민 선생은 농촌 운동가였다. 그가 일본에 건너가 북해도 삿뽀로 대학에 재학하며 W.S. 클라크 박사에게 농학을 배웠다. 안민은 농학만을 배우지 않았다. 그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예수 사랑도 그곳에서 배웠다.
그룬투비가 주장한 삼애운동은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흙을 사랑하자는 것이다. 안민은 삿뽀로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장연골에 농민숙을 차리고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 농민숙에 솔내 사람 정공빈과 최명오가 입학해 과학적 영농법과 함께 예수병에 감염되 돌아왔다. 그들은 소래 마을에 종묘원을 만들어 전국 농촌에 씨앗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 이 마을에 찾아온 전도자가 있었다. 서상윤과 서경조 형제였다. 서상윤은 알려진대로 중국 심양에서 로스 목사를 만나 성서를 번역한 지식인이었다. 서상윤은 1883년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을 소에 싣고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 변문에 다다랐다. 그때 두 사람의 포교가 소의 등에 실린 물건을 확인했다. 국가에서 금서로 정하여 반입을 막는 책이었다. 그는 즉각 구속되었다. 대원군은 야소라면 치를 떨었다. 그래서 서학꾼을 만나면 지체없이 관가에 고발을 하게 했고 도망쳐 놓치게 될 경우는 때려 죽어도 무죄로 받아 들이던 시절이었다. 서상윤은 죽을 운명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포졸 모두 그 부친의 친구들이라서 밤중에 그를 방면해 줌으로 구사 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서상윤은 바로 변문 감옥에 갇혀 하나님께 부르짖다가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솔내로 가거라. 그곳에 너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서상윤은 의주 사람이었다. 그는 동생 서경조를 대동하고 1884년 솔래에 들어와 정착하며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솔내 교회를 받든 이는 서상윤이 아니라 서경조였다. 서상윤은 이어 심양으로 들어가고 서경조가 남아 그가 칩거하던 초가에서 목회를 하다가 1887년 1월, 조사가 되면서 교회를 건축했다. 솔내 교회 교우들은 교회를 지으면서 교회터를 바로 당나무가 서 있었던 당골 성황당으로 했다. 소래 마을을 짓누르고 있던 이기적인 신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여호와 신을 모신 것이다.
다음번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