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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2000.03.24 22:5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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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만 먹어도 되겠니?"

힘이 하나도 없는 듯 들릴락말락한 조그만 목소리가

나뭇가지 끝에서 졸고 있는 사과에게 소근거렸다.

"응?"

"내가 너를 한 입만 먹어도 될까 물어봤어..."

"나를 말이야???"

"나는 지금 몹시 배가 고프거든.

탐스럽게 익은 너를 보니까 더 시장기가 돌아서 견딜 수가 없어..."

"히힛~ 하긴 내가 이쁘게 생기긴 했지~ 너도 보는 눈이 있구나~

보기 좋은 사과가 맛도 좋다는 말, 물론 들어봤겠지?"

"으음~ 게다가 너는 몹시 향기롭기까지 하구나..."

"호호... 그만 해, 얘... 쑥쓰럽잖니..."

"아... 한 입만 널 먹어봤으면 좋겠다...

나, 욕심 부리지 않을께. 꼭 한입이면 돼."

"난 아픈거 싫은데..."

"살짝 한 입만 깨물께... 나 너무 배가 고파... 제발...

너 내가 이대로 굶어죽기를 바라는건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면 내가 괜히 미안해 지잖아...

으음... 음... 꼼지락... 그럼 꼭 한 입만이다, 알았지?"

"응, 벌레의 명예를 걸고 약속할께... 고마워..."

"알았어... 자~!"

사과는 눈을 질끈 감고 벌레에게 한 입을 허락하였다.

"헉! 아퍼!! 아악! 싫어싫어!!! 비키란 말야!!"

순식간에 살갗을 뚫고 몸 속에 박혀드는 벌레의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서서히 온 몸에 번져가는 짜릿한 고통...

"흑흑... 제발 그만해!!!!!"

사과는 생각지도 않던 아픔에 허리를 꺾으며 비명을 질렀지만 벌레의 독이 사과의 신경을 마취라도 시켰는지
사과는 얼마지 않아 칼로 헤집는 듯한 고통에 무감각해졌다.

아삭아삭 자신을 갉아먹는 벌레의 모습을 보며,
사과는 전에 느껴본 적 없는 야릇한 환희에 몸을 떨기도 했다.

롤러 코스터를 처음 탔을 때의 두려움과 짜릿함이 섞인 새로운 느낌처럼...

그러나 짧은 환각에서 깨어나 사과가 정신을 차려보았을 땐 이미,한 입만... 한 입만을 고집하던 굶주려 가엾던 벌레의 모습은 없었다.

사과 깊숙이 머리를 박고 씨가 드러나도록 반 이상을 갉아먹고 있는 벌레는 굶주린 벌레는 어찌 손 쓸 수도 없을 만큼 수십마리로 불어나 있었다.

사과는 그제서야 "한입"의 허락을 씨앗이 마르도록 후회해봤지만...

뒤늦은 후회가 벌레들의 게걸스러운 입질을 막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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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타인과 자신...

나는 어떤 것들에게 "이번 한번만"
"더도 덜도 아닌 꼭 한 입씩만"을 허락하는지...
자신마저 속이며 내게 해가 되는 일도 서슴치 않지는 않는지...

때로는 내가 서 있는 상황과 느껴지는 감정에 대해서도
한번만 더, 이번뿐인데 머, 어떻게 될까? 라는 호기심을 접어두고
다가오는 위험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때로는 과감하게 NO 라고 말 할 수 있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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