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어 | 학원의 민주화, 사상의 민주화, 생활의 민주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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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 1949년 |
종류 | 사립 |
설립자 | 조영식 |
총장 | 조인원 (제13대)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
학생 수 | 학부: 24,705명 (2005년) 대학원: 9,071명 (2005년) |
학교법인 | 고황재단 |
웹 사이트 | 경희대학교 홈페이지 |
‘문화세계의 창조’를 통하여 ‘홍익인간의 이념을 구현’하는 것을 건학이념으로 삼고 있으며, 교훈은 ‘학원의 민주화, 사상의 민주화, 생활의 민주화’이다.
교표는 1951년에 제정한 것으로, 국제 연합의 정신을 본따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나무가 세계지도를 둘러싸고 있는 도안 위에 백색의 ‘대학’(大學)이라는 문자를 넣은 것이다. 교화는 목련으로, 창립 20주년을 기념하여 1970년 5월에 지정한 것이다. 이는 흰 목련이 순결, 무구, 정직을 상징하는 것 등에 뜻을 둔 것이다. 교가 이외에도 학교에서 자주 사용되는 가곡 ‘목련화’는 설립자 조영식이 개교 25주년을 기념하여 쓴 시 ‘4반세기 칸타타’ 에서 일부를 가사로 삼아, 작곡가 김동진이 곡을 쓴 것이다.[1]
이원화 캠퍼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캠퍼스 기구는 다음과 같다.
중국으로 넘어간 신민회 회원 이회영·이시영(李始榮) 등 6형제가 주축이 되어 1911년 류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추가가 대고산(大孤山)에서 경학사를 결성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1920년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문을 닫았지만, 해방 후 이시영은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을 설립, 지금의 조계사 뒤편(종로구 수송동 82번지)에 신흥전문학관을 세웠다.
1949년 이전에 해방과 함께 등장한 배영대학관과 신흥전문학관이 대학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데다, 또한 경영난에 처하면서 두 학교는 1949년에 재단법인 성재학원의 설립과 함께 이시영을 중심으로 신흥초급대학(2년제)의 가인가 설립을 통해 상황의 타개를 꾀하였다. 그러나 학교 경영의 어려움과 함께 두 차례의 사기로 인해 학원 경영이 더욱 수렁으로 빠져들자, 1951년 5월 18일에 조영식이 1,500만 원의 부채를 모두 상환하는 것과 함께 재단법인 성재학원을 인수하기로 하였다. 이 5월 18일은 현재 경희대학교의 개교기념일이자, 이후 경희대학교가 발전의 길로 나아가는 반환점이 되었다.
신흥초급대학을 인수한 조영식은 1952년 2월 3일, 영어과·중국어과·법정과·체육과의 4과를 갖춘 신흥초급대학으로 정식 설립인가를 받고, 같은 해 12월 9일에는 4년제의 신흥대학으로 승격했다. 이어 1954년의 대학원 설치 인가와 함께, 1955년에는 설립 이후의 숙원이었던 신흥대학교(4년제 종합대학)의 설립인가를 받으면서 현재와 같은 종합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를 즈음하여 현재의 동대문구 회기동 고황산(高凰山) 일대에 새 터전을 마련한 경희대학교는, 1955년에 ‘문화세계의 창조’라는 글을 새긴 교시탑을 준공하는 한편 1956년에는 현재 본관으로 사용되는 석조 본관을 준공했다. 석조 본관의 설계를 맡았던 조영식은 이후 1968년의 중앙도서관의 준공까지 설계를 담당하였으며, 이후 경희대학교의 여러 주요 건물은 유럽 여러 나라의 건축 양식을 이용해 조영식이 설계한 것이 더러 있다.
1960년에 법인의 명칭을 재단법인 고황재단으로 바꾸는 것과 함께 대학의 이름으로는 딱히 좋은 편이 아니던 신흥이라는 이름을 경희대학교로 바꾸었다. 1963년에 경희초급대학(2년제)의 설립과 함께, 1965년에는 학교법인 행림학원과 동양의과대학을 합병하였고, 이어 1966년에는 경희간호대학을 설립하였다. 다음 해(1967년)에는 경희초급대학을 경희여자초급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71년에는 현재의 부지에 경희의료원을 개원하였으며, 1975년에는 경희호텔경영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해에는 석조 본관 전면의 공사를 마치는 것과 함께 석조본관이 완공된 해이기도 했다. 1978년에는 경희여자초급대학이 문을 닫았으며, 1979년에는 경희간호전문학교가 경희간호전문대학으로 승격하였다.
1978년에 자연사박물관이 개관하였다. 이어 1979년에는 경기도 수원 일대(현재 용인시 기흥구 서천동 일대)에 수원캠퍼스를 설립하는 것을 인가받았으며, 1984년에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평화복지대학원의 개교와 함께 광릉캠퍼스를 설치하였다.
1998년에는 경희호텔경영전문대학을 폐지하고, 이를 흡수하여 경희대학교 호텔관광대학으로 하였으며 1999년에는 경희간호전문대학을 폐지하여 의과대학 간호학과와 함께 간호과학대학으로 하였다.
1995년에 수원캠퍼스 중앙도서관을 준공하였다. 1999년에는 1976년에 착공하였으나 정부의 반대로 인하여 완공을 못하고 있던, 평화의 전당이 정식으로 완공되었다. 동양 최대 규모의 종합 문화 예술 공연장으로 설계된 평화의 전당은, 조영식이 중세 고딕 양식으로 설계하였으며 경희 50년의 역사를 스테인드 글라스와 화강암 조각으로 담아내고 있다.
대수 | 이름 | 임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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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 조영식 | ||
제2대 | 고병국 | ||
제3대 | 조영식 | ||
제4대 | 안치열 | ||
제5대 | 심태식 | ||
제6대 | 박양원 | 1985년 ~ 1988년 | |
제7,8대 | 조영식 | ||
제9대 | 공영일 | ||
제10,11대 | 조정원 | ||
제12대 | 김병묵 | 2003년 11월 ~ 2006년 | |
제13대 | 조인원 | 2006년 ~ 현재 |
학부와 대학원 과정이 모두 개설되어 있으며, 2011년 현재 개설되어 있는 과정은 현재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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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학과·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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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현재 서울캠퍼스에는 15개 단과대학과 1개의 독립학과가, 국제캠퍼스에는 9개 단과대학과 1개의 독립학과가 설치되어 있다. 2009년부터 법학전문대학원이 개원되면서, 현재 서울캠퍼스 법과대학에서는 신입생을 받지 않고 있으며, 대신 자율전공학과를 신설하여 기존의 법학과 신입생 정원을 대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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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캠퍼스 중앙도서관
서울캠퍼스 중앙도서관은 설립자 조영식 총장이 기증한 7백여 권의 도서를 가지고,1951년 부산의 임시 가교사에서 개관하였으며, 1968년 6월 17일에 현재의 석조건물을 준공하였다. 현재는 본 건물 4층, 원형열람실 2층의 구조로 총 건평 3,900여 평에 95만여 권의 장서와 2천여 석의 열람석을 보유하고 있다.
1989년에는 한의학도서관을 개관하였고, 1972년에 설치한 의료원도서관을 기반으로2002년에는 의학도서관을 개관하였다. 2000년에는 법학도서관을 개관하였다. 1995년 도입한 전산 시스템을 비롯해, 1999년에는 웹 기반의 전자도서관을 구축하였고, 2005년에는 이른바 미래형 통합 전자도서관의 구축을 완료하였다.
국제캠퍼스 중앙도서관은 1980년에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당시 수원캠퍼스) 개교와 함께 이공대학관에 설치되었다가, 1995년에 지금의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993년에는 전산 시스템을 도입하고, 1999년에는 서울캠퍼스 중앙도서관과 전산 시스템을 통합하였다. 2003년에 UN 기탁도서관을 개관하고, 2004년에는 국제노동기구(ILO) 기탁도서관과 세계관광기구(UNWTO) 기탁도서관으로, 2005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 기탁도서관으로 선정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UNWTO와 IMF의 기탁도서관이기도 하다. 2009년 현재 국내외 단행본 총 857,095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2009 한국도서관연감).
경희대학교 혜정박물관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고지도 전문 박물관으로, 국제캠퍼스에 위치해 있다. 2002년 3월 1일에 설립된 혜정문화연구소를 모체로, 김혜정 석좌교수가 30여 년간 수집한 지도를 소장품으로 하여 2004년 5월 1일에 설립되었다. 900여 점의 고지도를 소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고지도 전문 박물관의 설립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이다.
경희대학교 우주과학교육관(경희천문대)는 1992년에 건립하였고, 이후 일반 관람객을 위한 전시장을 2개 층에 설치하였다. 대한민국 국내 대학 최대 규모의 76cm 구경을 가진 반사망원경과 관측 장비를 구비하였고, 입체 영상 시스템을 비롯한 시청각 시설과 교육시설을 구비하고 있다. 국제캠퍼스에 위치해 있다.
평화의 전당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은 1976년 6월에 착공하여, 1999년 10월 11일에 개관한 종합 문화 예술 공연장으로, 서울캠퍼스에 위치해 있고, 단일 공연장으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인 4,500석의 객석을 보유하고 있다. 3,300여 평의 대지에 지하 2층, 지상 6층, 옥탑 3층으로 건립되었다. 웅장한 외관을 자랑하는 평화의 전당은 경희 50년의 역사를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아름다운 화강석 조각으로 중세 고딕양식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또한, 슈퍼스타K 2와 코리아 갓 탤런트가 생방송을 했던 적이 있으며 현재 슈퍼스타K 3의 생방송 무대로 이용되고 있다.
경희의료원은 1965년 4월 27일 동양 의과대학 병합에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사회 일각에서는 한의사 제도를 둔 의료법이 한국 의료제도를 이원화함으로써 낙후성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여 제도 폐기론이 연례 행사처럼 제기되고 있었으므로 동의학(東醫學)의 학문적 연구 의욕은 좌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경희학원 설립자인 미원(美源) 조영식은 동양 의대를 병합한 후 한의학과를 신설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학계에서는 동의학을 현대적 의미에서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하게 되었으며 동서의학의 조화를 통해 제 3의학의 새 경지를 개척하게 됨으로써 한국 의료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66년에는 의과대학을 설립함으로써 한국 최초로 동서의학을 망라한 의학 교육 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의과대학병원 설립작업이 추진되었다. 의과대학병원 설립준비위원회(위원장 : 박양원 교수)가 발족되어 의료 시설도입, 의료진 확보 등을 진행하였고 1970년에는 의과대학병원 경희의료원으로 개칭하여 개원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6년 6개월의 오랜 준비끝인1971년 10월 5일, 30여억원의 건축비를 투자하고 18층의 현대식 매머드 건물 및 최신 의료 장비를 갖춘 경희의료원은 의과대학병원, 치과병원, 한방병원이 복합된 동서의학의 요람으로 거대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이와 동시에 동서 의학의 융화를 통한 제 3의학의 창조를 위하여 부설 동서의학 연구소를 함께 설치하였다.
경희대학교는 2011학년도 봄학기부터 대학교육의 본질 목적을 되찾고 학부 교양교육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교양교육 프로그램을 전면 개편하여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출범시켰다. 이 프로그램은 대학 안팎의 시대적 압박에 밀려 심각한 왜곡과 변질을 강요받고 있는 대학교육의 근본적인 역할과 목적을 재확인하고 교양교육의 품격을 회복하며, 그 교육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마련됐으며,
등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인문학적인 소양을 경희대의 모든 학생들에게 배양하여 창조적이고 종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스펙트럼 넓은 인재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실용적인 소양을 심어주는 데 주력하는 중앙대와 인문학적인 소양을 심어주는 데 주력하는 경희대가 대척점에 서 있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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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에 당시 경희대학교에 재직중이던 서정범이 한 무속인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유로 피소되었다.[2] 검찰은 무속인의 고소내용이 허위라고 판단해 서교수를 무혐의 처리했다.[2] 무속인의 녹취록은 철저히 짜집기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검찰은 많은 관련 사고가 있었지만 이렇게 철저하게 조작된 경우는 보지 못했다고 밝혔고.[2] 검찰은 오히려 무고죄로 무속인을 고발했다. 그 무속인은 서 교수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이런 일을 벌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
무죄가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의혹을 강력하게 제기한 경희대 총여학생회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2] 성추문 사건은 루머로 결론났으나, 당시 그를 강도높게 비판하던 경희대학교 여총학회는 그에 대한 사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총여학생회는 해체까지 될 뻔했다.[3]
2010년 5월 15일 한 포털 사이트에 “경희대 학생에게 어머니가 봉변을 당했습니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머니께서 경희대에서 환경 미화원 일을 하시는데 어떤 여학생이 어머니에게 우유를 치우라고 성질을 내 어머니께서 학생에게 사과받으러 학생 휴게실에 갔지만, 학생이 짜증을 내자 어머니도 함께 언쟁을 하게 되었고 끝내 학생은 어머니에게 상식 이하 욕설과 직업 비하발언, 더불어 연장자로서 감내하기 힘든 모욕을 주었다.[4]
이 사건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일파만파로 퍼졌다. 해당 휴게실에 있었던 다른 학생이 녹음을 한 녹취록도 공개되었다. 총학생회와 경희대측에서 조사한 결과 사실로 드러나 언론에 보도되었다.[5] 이 사건은 일명 ‘패륜녀’, 또는 ‘우유녀’, ‘경희대녀’ 등으로 불렸다. 경희대 측에서는 해당 학생을 징계할 방침이지만, 피해 당사자는 사과를 바랄 뿐 징계는 원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6] 5월 20일 해당 학생은 환경미화원을 찾아가 사과하였다.[7]
음악 대학 신규 교수 임용을 두고 음대 총동창회에 의해 제기되었다. 2010년 7월 6일에 경희대 음대의 총동창회장, 발전추진위원회 수석부위원장, 학생부회장 등 3명은 2010년 2월에 임용된 전임교원 3명에 대해 임용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서울지방법원에 냈다.2009년 6월에 기악·작곡·성악 세 분야에서 채용 공고를 내었는데, 분야당 2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경희대 내·외부 교수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은 이들의 이력서와 연주를 담은 CD 등을 바탕으로 7월 말 1차 서류심사를 끝냈다. 경희대의 ‘전임교원 임용 규정 시행세칙’에 의하면 1차 서류심사에 합격한 사람에게 연주와 강의실력을 평가하는 2차 심사에 참여할 자격을 주게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2차 심사는 곧바로 진행되지 않고 미루어 졌으며 8월 말에 새로 취임한 음악대학 학장은 이전 서류 심사 결과를 무효화하고 각 학과 교수들에게 2명씩 추천 받아 이 중에서 전임교원을 선발했다. 이에 동창회장은 “이 과정에서 처음 서류 심사에서 1, 2등을 차지했던 우수한 지원자들에게 2차 시험의 응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8]
2010년에 경희대학교 음악 대학 학생들이 “인간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일부 교수가 학교를 망가뜨리고 있다”며 국회와 교육과학기술부, 여성가족부, 국민권익위원회 등 국가기관과 시민사회단체에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탄원서 내용은 음악 대학에 재직중인 A교수가 자신의 2학년 여제자 및 그 부모등 총 7명이 경기도 과천에서 술자리 및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었다. 그 자리에서 A교수는 여학생에게 술을 따르라 했고, 여러 차례 술을 권했으며, 취기가 오자 여학생에게 “내 연구실에 놀러오라”, “내 방은 일단 들어오면 문 열고 나가기가 힘들다”, “학교 앞에서 자취해라. 그래야 많은 경험을 한다”, “내가 경희대 음대의 실세”라고 발언하였다. 그러다가 학생의 어머니는 교수가 딸에게 계속 술을 권하고 듣기 거북한 대화가 이어지자 딸에게 먼저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러자 회식이 끝날 무렵 A교수와 여학생의 아버지 두 사람만 테이블에 남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식당 밖으로 나갈 채비를 차리고 있었을 때 A교수가 여학생의 부친의 머리를 술병으로 내리쳤으며 여학생의 부친은 기절하여 병원으로 실려가 머리 상처 부위를 15바늘 꿰맸다. A교수는 폭행 혐의로 과천경찰서에 입건되었다. 이러한 내용 뿐만 아니라 2010년 2월에 인천의 한 팬션으로 캠프를 갔을 때 숙소에서 여학생들과 따로 술자리를 가진 것과 일주일 후 강촌에서 열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학생이 “돈(캠프비 15만원)이 없어 못 갔다”고 하자 교수는 주변에 있던 다른 학생들을 모두 무릎 꿇게 한 뒤 “왜 거짓말 하느냐”고 신입생을 다그쳤다는 내용 및 여학생과의 모텔 출입 의혹도 탄원서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교수의 이런 부적절한 행동에도 음대 내부에서 나서서 비판할 수 없었던 것이 교수가 자신이 지도하는 학생 60여명에 대한 학점, 장학금은 물론 취업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실제로 “그 교수가 자신을 비판하는 학생에게 F학점을 주는 등 실제로 보복을 했다”면서 “많은 학생들이 A교수의 잘못을 알아도 참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라는 내용도 탄원서에 포함되었다.[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