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위협이 없는 상황에서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호언 장담했던 베드로였지만 생명의 위협을 직접 느끼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부인하고야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는데, 특히 그가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할 때는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했다는 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어떻게 용서를 받고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계속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3)고 말씀하셨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황에 대한 고려의 중요성을 살펴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당시 상황에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함이었지 그의 본심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중심에서 하나님을 반역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해하시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국 교회는 일제시대 신사 참배 문제로 큰 혼란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신사 참배를 끝내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수감되었던 자들이 해방을 맞이하여 출옥한 후 신사 참배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정죄하면서 교회는 해방의 기쁨을 채 맛보기도 전에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연약함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예수님을 부인한 것을 끝까지 단죄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용서하셨듯이 그들도 이미 용서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