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의 분깃을 미리 달라하여 이것을 챙겨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제 마음대로 하려는 자율적인 의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주권자 하나님과 멀리하며 자기의 정욕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집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비참하고 불행하여졌습니다. 그는 허랑방탕하다가 마침내 먹을 것도 없이 주려서 죽게 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17절).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나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온 아들은 신분과 지위를 회복하고 온전한 권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큰아들은 둘째와 달리 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여러 해 동안 집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섬겼다고 하였습니다(29절). 그렇지만 이 아들도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다음 그 아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읽지 못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잔치를 하고 지위를 회복시켜 주려는 아버지의 뜻에는 크게 거부감을 가지며 반항하였습니다. 말로만 아버지의 명을 지키며 섬겼을 뿐 마음으로는 한없이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자기의 주관과 생각에 따라 아버지를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아버지의 요청을 거절하고 집밖에서 맴돌며 반항아의 행위를 하고 말았습니다.
구약의 이사야는 범죄한 인간의 모습을 탕자의 문명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사야 1:2에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4절에는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고 하였습니다. 큰아들(유대인)이나 둘째아들(이방인)이나 구별 없이 아버지를 배반하거나 그 마음에 반하는 행위를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결과는 모두에게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한량없는 아버지의 사랑이 회복과 변화의 동인이 됩니다. 에스겔 33:11에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