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 정신을 발휘합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시간과 공간의 벽도 거뜬히 넘어서는 신비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세기의 전도자 바울은 그리스도 복음을 위하여 아시아와 유럽을 누비면서 온갖 박해와 시련을 겪었지만 지치지 않는 힘을 과시하였습니다. 로마 옥중에서 죽음의 날이 임박해오는 그 시간에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며 불굴의 도전정신을 발휘하였습니다(빌 4:13). 그는 평생 동안 쌓아놓은 실적이 있음에도 아직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하며 목표를 향하여 더욱 매진한다고 하였습니다(12절). 그리스도인은 해가 바뀌고 환경이 달라져도 새롭게 시작하는 자세로 도전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1. 목표가 바른 사람입니다.
세상 가운데서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목표로 삼는 자입니다(히 12:2). 빌립보서 1:21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주권을 의식합니다.
본문 14절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이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은 자기의 의로움이나 공로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로마서 9:16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경우 자기는 본래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기 때문에 전혀 자격이 없는 자이지만 도리어 긍휼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딤전 1:13). 이처럼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마음속에 감사와 감격을 가지게 됩니다.
2) 부르신 자의 뜻을 분별합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이유를 아는 사람은 그 목적을 위해서 인생을 거기에 집중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한평생 그 일에 매진하였습니다(히 11:8-10).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사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그 후손들을 천하 만민에게 미칠 축복의 근원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창 1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종 되었던 애굽에서 불러내신 것도 그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운동의 표본을 삼고자 함이었습니다(출 20:1-3).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름은 매우 희망적인 부름이요 복된 부름입니다. 골로새서 1:13에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복된 부름에 대한 감격을 가지고 그 목적에 따라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3) 보이지 않는 소망을 붙잡고 있습니다.
에베소서1:18-19에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위에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또 말로 다 할 수 없는 소망의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영광스러운 기업이요 또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신비로운 힘과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둡니다. 고린도후서 4:18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소망이 있기 때문에 여간한 환난과 시련도 인내하면서 극복하게 됩니다.
2. 제게 있는 것을 내려놓습니다.
자기가 목표하는 경주에 전력투구하려고 하면 먼저 거리낌이 되는 것부터 제거하고 내려놓아야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붙잡아야 될 최상의 가치를 위하여 제게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고 하였습니다.
1) 육신을 신뢰한 것들입니다.
사람마다 제게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좋다고 생각할 때 거기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당대에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만큼 많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육체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4절). 5-6절에 “나는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고 다른 사람보다 학벌이 좋고 많은 재산을 가졌거나 권력 또는 명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이 사라지기도 하고 풀의 꽃과 같이 쇠잔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 40:6-7).
2)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된 사람은 이전에 행하던 모든 행실을 ‘썩어져 가는 구습’이라고 여기며 거기서 벗어나려고 합니다(엡 4:22-24). 이와 같은 변화는 필요에 따라서 잠시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벗어던지고 새 사람의 옷을 입자는 것입니다(롬 13:13-14). 본문 말씀 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이라고 하였습니다. ‘배설물’이란 화장실에 쏟아 놓은 더러운 것을 뜻합니다. 왜 그토록 좋은 것으로 여겨 기어이 붙잡고, 또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자랑스럽고 뽐내었던 것을 한순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고 보니 다른 것은 부질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3) 거추장스럽고 해로운 것들입니다.
본문 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해로 여긴다는 것은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좋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세상을 편리하게 살아가도록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에는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은 그 가는 길에 거리낌이 되고 얽어 묶는 모든 것들을 다 벗어 버려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진즉부터 내려놓아야 될 것을 정리하지 못했을 때 그것이 가시채로 뒷발질하는 것 같은 고통이 된다고 하였습니다(행 26:14). 제게 거리낌이 되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올무가 되는 줄 알면서도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고통 같은 아픔과 눈물이 따르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3. 새로운 도전을 시도합니다.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비결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옥중에 있으면서도 어떤 경우이든지 이것을 극복하는 일체의 비결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빌 4:12-13).
1) 미완성품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2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부족을 인식합니다. 여기 “얻었다 함도 아니요...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한 것은 자기가 아직도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실토하는 말입니다. 이는 그의 신앙과 인격과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이 미완성이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1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복음 전도자로서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업적을 이루어 놓았지만 아직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고 부활에 이르고자 하는 간절한 집념으로 더욱 매진한다는 뜻입니다.
2) 잡힌바 된 것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은 바울이 자기의 인생을 걸고 달려가는 목표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붙잡혔습니다(행 9:3-5). 그때부터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리스도에게 매인바 되었습니다. 로마서 14:8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살아야 되는 그의 사명을 뜻합니다(행 9:15). 그런데 여기 바울은 자기의 힘과 의지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주권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뜻합니다. 주님께 붙잡힌바 된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3) 상급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14절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에게는 존귀한 신분상의 특권과 함께 꿈같은 하늘의 기업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보장된 축복입니다. 에베소서 1:3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에게 주시는 기업의 영광이나 특권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끊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롬 8:38-39). 계시록 3:11에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