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아버지에게 다가갈 수 있는 특권을 행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신앙 행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가 신비로운 능력을 행사한다고 하였습니다(마 21:22).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지만 기도를 통하여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물이 쏟아지는 등 기적을 이루어냈습니다(약 5:17-18). 많은 사람들은 엘리야처럼 기도를 통하여 기적을 이루고 신비를 행사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기도가 마냥 기적적인 신통술의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건전한 기도는 그의 삶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모범으로 삼아야 됩니다(마 6:9-13). 여기 아굴의 기도문도 매우 평범하면서도 의미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진실을 추구하는 기도입니다.
아굴은 자기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거절하지 마시고 죽기 전에 꼭 이루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루어지는 기도가 평생 동안 자기의 삶으로 이어질 것입니다(7절). 그것은 헛되고 거짓되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얼굴을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그 얼굴을 비추사 은혜와 평강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민 6:25). 기도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의식하는 자입니다.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였습니다(마 5:8). 청결한 마음은 거짓이 없는 진실된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진솔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자기에게로 향하고 계시기 때문에 자기의 앉고 일어서는 것도 아시고 심지여 마음속의 생각까지 알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시 139:1-2).
2)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기도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신 7:9). 로마서 3:4에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고 하였습니다. 참되신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지 못한 말이나 행위를 싫어하십니다. 시편 15:2에 보면 하나님의 성산에 오르는 자는 정직하게 행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나 움직이는 행위 가운데 진실하지 못한 것을 쉽게 감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의 눈만 의식하는 나머지 거짓된 기도를 하는데 대하여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 6:5-8).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하고 부르짖었습니다(시 17:1).
3)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사람마다 양심이 있습니다(고후 1:12). 본래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속에는 진실을 추구하는 본성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19에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헛된 것과 거짓말을 서슴없이 행하게 될 경우 그 마음속에서 이를 거부하는 반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2:15에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거짓되지 않는 삶을 실천하는 사람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습니다.
2.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말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것이나 부요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굴은 가난한 사람이 겪어야 되는 고통과 시험을 알았습니다. 또한 부요할 때 교만하고 방종하는 인간의 본성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말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1) 범죄한 인간의 실상을 아는 자입니다.
아굴의 기도를 보면 가난한 사람도 문제가 있고, 부요한 사람도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식하며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물질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신약의 야고보는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고 하였습니다(약 1:9-10). 옛날 선비들은 청빈함을 자랑했고 인간의 실상을 아는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하여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실천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범죄한 인간의 마음에는 욕심이 있어서 물질을 보게 되면 거기 노예로 전락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6:24).
2) 부요할 때 오는 문제를 아는 자입니다.
9절에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물질이 부요하여 배부르게 먹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은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렇지만 막상 재물이 많아지고 부요하게 되면 교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고 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겪었던 어려운 시절은 생각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멸시합니다. 옛날 마온 땅에 사는 나발이 그런 사람입니다. 자기는 매일같이 호화판으로 잔치하면서 다윗의 사환들이 찾아갔을 때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하고 폭언을 하며 멸시하였습니다(상상 25:10-11).
3) 가난할 때 오는 문제가 있습니다.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 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옛말에 “삼일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뛰어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배고픔을 참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요즘에는 ‘생계형 도둑질’이라는 말도 유행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도 너무 가난하여 가족들의 생계가 어렵게 되면 원치 않는 과오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빈부가 섞여 사는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사람의 능력이나 인격을 비교하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하고 좌절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런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신앙에 상처를 입게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3. 분수에 맞게 해 달라는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충만하신 분입니다(엡 3:19). 그러나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인간의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악용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나 남았지만 그 부스러기 하나도 허비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요 6:12).
1) 일용(日用)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먹고 입고 사는 의식주(衣食住)문제는 매우 절실한 요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대목을 일러 주셨습니다(마 6:11). 본문 말씀 8절에도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기도입니다. 조금도 허황되지 않고 가장 합당한기도입니다. 그러면서도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꼭 필요한 만큼 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원은 하나님께서도 만족하게 여기십니다. 옛날 애굽에서 올라온 이스라엘이 광야 여행을 하는 동안 매일 아침 하늘의 양식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때도 한 사람당 한 호멜씩 그날그날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게 채워주셨습니다(출 16:4).
2) 자족하며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야고보서 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욕심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6에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유익이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물질의 있고 없음에 상관없이 받은 것으로 만족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부리며 부하려고 무리수를 쓰게 되면 시험과 올무에 걸리게 되고 급기야 파멸을 가져오게 된다고 하였습니다(딤전 6:7-10).
3) 최상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부요함을 자랑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두고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한자”라고 하였습니다(계 3:17). 그렇지만 환난과 궁핍이 극심한 서머나 교회는 “사실상 부요한 자“라고 하였습니다(계 2:9). 예수님께서는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15).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한편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지도도 남을 만큼 행복한 사람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합 3: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