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자손들이 동방의 시날 평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의 상징물로 하늘에까지 닿을 수 있는 탑을 쌓았습니다. 그것이 바벨탑(塔)입니다. 바벨탑은 최초의 인공도시를 상징하는 거대한 조형물로 설계되었으나 그 실체는 끝내 만들어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름뿐인 바벨(혼잡)은 수천 년 동안 전해져 오면서 인간역사의 실제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자칫 고대사의 금자탑으로 길이 남을 뻔했던 바벨탑이 착공도 못한 채 사라져 버린 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 5절에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받은 바벨론과 함께 바벨탑은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허무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계 18:2).
1. 동기가 불순했습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 가운데 삶의 목적과 방법을 하나님 제일주의에 근거하는 사람이 있고 무엇이나 자기의 의지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바벨탑 운동의 주역들은 하나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들의 목적을 관철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1)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4절에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시날 땅에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하고 하늘까지 닿는 높은 탑을 쌓고자 했던 것은 신앙적인 동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저들이 하나님과 같은 높이에까지 오르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노아의 후손들로서 지긋지긋한 홍수의 심판을 겪었기 때문에 이제는 또 다시 그런 심판이 오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택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탑의 꼭대기가 하늘에까지 닿게 하여 하나님과 마주 대할 수 있겠다는 오만한 생각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게 된 것도 그들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뱀의 말에 현혹되었기 때문입니다(창 3:5).
2) 이름을 드러내려는 생각입니다.
4절에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낸다는 것은 공명주의(功名主義)적 발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주권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롬 11:36). 고린도전서 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야 되는 인간이 하나님보다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고 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신앙적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인간의 소행을 절대로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43:8에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3) 흩어짐을 면하자는 생각입니다.
“......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모이고 힘을 뭉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여기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은 선한 목적의 동맹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인간들의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악한 목적으로 동맹을 꾀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위배하는 행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간들에게 온 땅에 충만하여 자연과 만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창 1:28). 옛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인물들은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여러 곳으로 유랑하며 살았습니다(히 11:13). 하나님의 백성들은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아가면서 간 데마다 복음의 씨앗으로 그 역할을 감당하는 자들입니다(벧전 1:1).
2.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동기나 목적이 하나님 중심일 때 그 방법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들이 성읍을 건설하고 탑을 쌓으면서 순리적인 방법이 아닌 자기들의 편의에 따라 변칙적인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1) 은혜에 의존하지 않은 것입니다.
3절에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돌을 가지고 성을 쌓는 통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벽돌과 역청을 사용하는 다른 공법을 택했습니다. 도시와 성읍을 건축하는 데는 많은 바위와 돌이 소요되지만 평야인 시날 땅에서는 그런 것을 구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천혜(天惠)의 축복을 누리지 못할 때 인공적인 가공품으로 이를 대신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흙이 돌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신상을 받치고 있던 진흙은 뜨인돌의 일격에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단 2:35). 성경은 예수님을 보배로운 모퉁이 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과 연합된 공동체입니다(벧전 2:4-5).
2) 인공문명을 과시한 것입니다.
흙을 이겨서 견고한 벽돌을 만들고자 한 것은 과학적인 발상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변질되었지만 세상적인 지식이나 과학적인 기술은 많이 발전시켰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고대 사회에서 상상도 못했던 최첨단 기술과 문명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야발은 대단위의 목축업을 하는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 유발은 수금과 퉁소와 같은 악기를 개발하여 음악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씰라의 아들 두발가인은 구리와 각종 쇠붙이로 많은 사람을 죽이는 전쟁무기를 발명하였습니다(창 4:20-24).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문명의 표본입니다. 예레미야는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렘 17:5).
3) 하나님 나라에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 2장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의 꿈은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곧 광채가 나는 순금 머리와 은으로 된 가슴과 팔,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 그리고 무쇠로 된 종아리와 또 쇠와 진흙이 섞인 열 발가락입니다(단 2:32-33). 지혜자 다니엘의 해석에 따르면 이 거대한 신상은 느부갓네살 이후 이어지는 세계사의 흥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찬란한 바벨로니아 문명을 비롯해서 페르시아, 희랍, 로마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수놓았던 화려한 인공문명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역사입니다. 그 거대한 신상이 난데없이 날아든 뜨인돌에 의하여 산산조각 났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나라의 문명들도 결국 산돌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정복되고 마는 것입니다.
3. 멸망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계시록 18:2에는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벨론의 심판은 그 시작 때부터 예견된 종말입니다.
1) 인간의 교만이 빚은 결과입니다.
베드로전서 5:5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벨탑 운동은 오만한 인간이 빚어 낸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1절에 “온 땅에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는 사람들이
저희끼리 말과 뜻이 통하기 때문에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자기 신에 빠져 버렸습니다. 마음 맞는 사람들이 동맹을 하고 거기서 얻는 효과를 극대화시키게 되면 하나님도 저희들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라는 망상입니다. 세상의 정치나 권력도 자기 과신에 빠지게 되면 교만하게 되고 결국은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세기 교회가 말씀에서 이탈한 나머지 교권을 남용하는 등 교만해졌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2) 혼잡과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7-8절에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고 하였습니다. ‘바벨’이라는 말은 ‘혼잡’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쌓던 성이 외부로부터 물리적인 힘에 의하여 파괴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니 저절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께로부터 한 혈통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행 17:26). 그렇지만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대적이 되었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와 문명은 혼잡과 분열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진리의 개념이 혼잡해졌고 사람마다 가치관의 차이와 사상의 대립으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지면 말과 언어가 달라도 하나로 연합할 수 있습니다(고후 5:17).
3) 영원한 소망을 사모해야 됩니다.
바벨탑 공사를 무산시키신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역사를 시도하였습니다. 갈대아 우르에 사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선민의 조상으로 삼았습니다(창 12:1).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순종하며 따랐습니다(히 11:8).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이삭과 야곱까지도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평생 동안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하늘에 있는 성을 사모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히 11:16). 하늘에 소망을 두지 못하는 사람들은 땅에 있는 것에 집착하는 나머지 바벨탑 운동을 전개합니다. 이들은 배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으며 땅의 일만 집착합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입니다(빌 3:18-19). 그렇지만 우리와 같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땅에 있는 바벨탑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땅위의 장막은 무너지더라도 하늘에 있는 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