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좋은 것을 서로 가지려고 합니다. 선호도가 높은 것일수록 경쟁자들이 쟁탈전을 벌이곤 합니다. 권력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피도 눈물도 없이 경쟁합니다. 재물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부모의 유산을 형이 다 차지했는데 그것을 나눠 갖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13-15). 물질보다 생명이 좋습니다. 아무리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어도 생명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본문 말씀 중에는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좋은 것은 생명입니다.
1.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모든 좋은 것을 은사로 주셨습니다(고후 9:15). 그 은사는 사람에 따라서 많이 가진 자도 있고 적게 가진 자도 있지만 생명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자입니다.
요한복음 1:4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3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근원이시며 또한 모든 생명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피조물 중에 사람의 경우는 특별한 계획과 동작이 행사되었습니다. 창세기 1:26-27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고 하였습니다. 2:7에는 먼저 흙으로 형체를 빚어 놓고 코에다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 생명을 창출할 수도 없고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명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2) 하나님은 생명의 관리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피조물을 소중하게 여기시며 그것을 관리하십니다. 이사야 40:26에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만물을 세심하게 관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만물의 영장이 되는 사람의 생명은 더 소중하게 다루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매우 아끼신다고 하였습니다(마 6:26-32).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자연과 만물을 먼저 지어 놓으시고 제일 끝에 사람을 지으신 것도 인간을 위한 배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생명을 풍요롭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에는 양과 목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고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들입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 양들의 생명을 지킵니다. 양의 우리의 문을 열고 각각 이름을 불러 인도해 냅니다. 사자나 이리와 같은 사나운 맹수가 양들의 생명을 움키지 못하게 보호합니다. 양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서 또는 나오면서 꼴을 먹게 해 줍니다(요10:9).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며 영혼을 소생하게 하여줍니다(시 23:2-3). 양들이 목자와 함께 있고 목자의 관리를 받으면서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더욱 풍성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0:10).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하였습니다.
1) 사람의 생명이 가치가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유증은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거나 함부로 취급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은 자기의 동생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창 4:8). 그의 후손들은 각종 쇠붙이로 날카로운 기계와 대량살상 무기를 만들었습니다(창 4:22). 폭력으로 남의 생명을 빼앗는 것도 문제이지만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끊는 자살 행위도 모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악입니다. 자연을 보호하고 야생 동물이나 식물은 보존한다고 하면서 사람의 생명은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도 잘못입니다. 환경을 지키고 자연의 원형을 보존하는 이유도 결국 사람의 생명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물질을 위해서 생명을 희생시키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이 음식이나 의복보다 중하다고 하였습니다(마 6:25).
2) 거듭난 자의 생명이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가리켜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으면 제게 좋을 뻔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마 26:24). 누구나 자연인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해악을 끼치는 무가치한 상태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가 되면 전혀 다른 차원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도리를 말씀하실 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요 3:6-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입니다(롬 8:1-2). 이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옛 사람의 생활에서 변화되어 새 사람의 삶을 실천하는 자입니다(엡 4:22-24).
3) 목적 있는 자의 생명이 가치가 있습니다.
일반은총의 원리에서 보면 목적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고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생명입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보배처럼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물 가운데로 지날 때 물이 침몰하지 못하게 하며, 불 가운데로 지날 때 불꽃이 사르지 못하게 보호 하십니다(사 43:2-4).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목적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사 43:21). 사무엘상 25:29에 보면 다윗의 생명을 원수들이 해하려 하여도 하나님께서 자기의 생명 싸개 속에 감추어 보호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생명과 존귀함이 하나님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행 13:22).
3. 생명의 가치를 높여야 됩니다.
생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9:10에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죄와 마귀의 권세 아래 있어 잃어버린 바 되어진 생명을 회복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1) 죽음에서 살려내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람이 자기의 위치에서 이탈하여 본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하였습니다(계 3:1). 죽은 자의 위치에서 살아나 생명력을 발휘하게 해 주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죽은 해골들을 살려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분부대로 골짜기에 있는 마른 뼈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그때 생기가 들어가서 죽은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겔 37:1-10).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사실상 영적으로 생명을 잃은 자입니다. 우선적으로 그들을 살려내는 것이 시급한 과제입니다. 에스겔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언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고 새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2) 생명의 토양을 가꾸는 일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생명을 튼튼히 가꾸어 주는 곳입니다. 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0:10). 예수님께서는 이 사역을 자기의 교회와 그의 종들에게 맡기셨습니다(요 21:15-17). 교회는 좋은 목장이 되어 주님의 양들에게 늘 푸른 초장과 맑은 물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됩니다(시 23:2). 사자나 이리 같은 맹수들에 시달리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양들이 평화로운 주님의 목장에서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길가 밭이나 돌짝밭이나 가시덩굴같은 거친 토양에서는 생명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교회야말로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자양분의 공급원이 되는 것입니다.
3) 생명의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생명은 천하보다 귀한 가치가 있지만 묻혀져 사장(死藏)되어 있으면 그 진가가 발휘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사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생명의 능력을 행사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4:8-10). 수천 년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수없이 많은 박해와 수난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발휘되어 거뜬히 이겨내었습니다(히 11:33-40).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죽어도 살고 영원히 사는 부활과 영생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맞설 수 있습니다(고전 15:5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