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기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교훈과 행적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인의 구주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그 말씀의 권세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월등하다고 인정했습니다(마 7:29). 예수님의 이적을 본 다음에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하고 절을 하기도 하였습니다(마 14:33).
예수님의 활동 반경은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대지경과 갈릴리와 사마리아와 이방인의 지역까지 한계가 없었으며 그가 관계하는 사람들도 각개각층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만인의 구주가 되신다는 증거입니다. 죄로 인하여 온갖 질병과 재난과 죽음아래 좌절하는 인간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치유와 회복으로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시돈 땅에서 예수님을 만난 수로보니게 여인도 이와 같은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1. 범죄한 인간의 표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 9:12).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범죄한 인간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의 표본입니다.
1) 가나안 여자입니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된 마태복음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불리는 유대인들의 민족정서가 묻어납니다(마 3:9). 그것은 저희들만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고 이방인은 하나님의 축복과 상관없는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입니다. 여기 예수께서 지나가셨다고 하는 두로와 시돈 지방은 갈릴리의 북쪽에 있는 이방인의 땅입니다. 본문 말씀 22절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님께 나와서 소리 질렀다고 하였습니다. 가나안은 여호수아의 군대가 들어오기 이전 그 지역을 지배했던 팔레스타인의 원주민 이름입니다(창 10:15). 마가복음 7:26에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하였습니다. 수로보니게는 수리아에 속한 베니게라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이곳 사람들을 “흑암에 행하던 백성”으로 표현하였습니다(사 9:2).
2) 문제를 안고 있는 여자입니다.
예수님께 찾아 나온 그 여인은 예수님을 향하여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마가복음 7:25에는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자식이 고치지 못할 병에 걸렸을 때 그 부모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여인도 흉악한 귀신에게 시달리는 딸의 문제로 오래도록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귀신에게 빼앗긴 딸을 찾아 달라고 호소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의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다’고 했는데 이는 회복불능의 상태로 악화된 것을 뜻합니다. 성경은 죄 아래 있는 인간의 고통을 사탄에게 얽매인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눅 13:16, 엡 2:2).
3) 자기의 한계를 아는 여자입니다.
사람이 어떤 사고나 질병 또는 죽음과 같은 절박한 상황에 직면하고도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면 자괴감에 빠지고 맙니다. 여기 예수님께 나아온 여인의 경우 사랑하는 딸을 귀신에게 빼앗기고도 자기는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두 눈을 뜨고 얼굴을 마주보면서도 어머니와 딸 사이에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안 됩니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행복을 공유할 수가 없습니다. 모녀간에 가장 깊은 신뢰와 사랑, 진한 감정의 교류를 사탄이 가로막았습니다. 딸을 위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고 희생을 자원하고 싶지만 어찌할 수 없는 모성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가지고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이처럼 인간 능력의 사각지대를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큰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사건의 열쇠는 여인의 큰 믿음입니다. 본문 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1) 예수님께 나아온 것이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가리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라고 하였습니다(엡 1:1). 이는 ‘믿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요건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 11:6).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요 1:12).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엡 2: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없음을 두고 책망하였습니다(마 8:26).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예수님께로 나오고 그를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였습니다(마 11:28). 하나님께서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고 하였습니다(사 55:1). 여리고 성의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나갔다가 자기 집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눅 19:1-10).
2)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22절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약속의 구주요, 메시야이심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호칭이 여러 가지로 사용되었습니다. 가령 ‘나사렛 예수’(행 3:6), ‘랍비’(요 3:2), ‘선생’(눅10:25)과 같은 경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해서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강조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했는데 이는 다윗이 아브라함과 예수님을 연결하는 중간 인물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면서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줄기요, 뿌리라고 하였습니다(사 11:1).
3) 확신과 인내의 사람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서 그의 소원을 들어 주시고 딸을 고쳐 주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불평하지 않고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처음 여자가 소리를 질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23절). 무안할 정도로 그 여인의 말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이를 보고 민망하게 여긴 제자들이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하고 권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24절). 예수님께서 가나안 사람인 그 여인을 향해서 주님과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박대하였습니다. 그래도 그 여자는 예수님에게 절을 하면서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무시를 당하고 모욕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소원이 성취된 사람입니다.
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1) 목표가 분명하였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자기의 욕심이나 열정만 가지고 부르짖는 것은 곤란합니다. 기도를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두서도 없이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것을 금했습니다(마 6:7).
한 가지를 구하더라도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와야 됩니다. 여리고의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맹인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분명한 목적을 밝혔습니다. 야고보는 주님께 구하는 사람이 자기의 정욕을 위한 목적으로 구하게 되면 응답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약 4:3). 여기 나온 여인은 흉악한 귀신에 시달리며 고생하는 딸을 살려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일은 주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시고 응답해 주시는 일입니다(마 16:26).
2) 주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호의를 뜻합니다. 여기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예수님께 나와서 딸의 생명을 구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의 열정이나 적극적인 행동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이 작용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디에서나 언제든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였습니다(고전 15:10).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여 이루어낸 결과라 하더라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로마서 9:16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3) 여인의 수용하는 자세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의 딸이 고침받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 왔으나 큰 실망과 좌절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타깝게 부르짖는 여인의 호소를 외면하였습니다. 오히려 가나안 여자라고 민족적인 차별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하고 개처럼 취급하였습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수모를 느낄 만했습니다. 그래도 이 여인은 거기 대하여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27절에는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수용하였습니다. 개와 같은 취급을 받아도 불평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부스러기 같은 것이라도 좋으니 주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감사하겠다는 신앙입니다. 예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