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설교

장년
예람지기 2010.04.18 00:00:00
1107
  • 일자
    2010-04-18
  • 설교
    손상률 목사
  • 성경
    창세기 3:8~12

창세기는 ‘시작(Genesis)의 책’입니다. 천지와 만물의 시작, 인류의 시작, 범죄와 징벌, 속죄와 구원의 시작, 믿음 곧 선민의 시작, 계시와 언약의 시작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개혁자 루터(Martin Luther)는 창세기를 ‘모든 신앙과 교리의 모태’라고 하였습니다. 주권자 하나님의 섭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적 경영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약이나 신약의 모든 성경은 창세기를 모체로 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성경 중에 인간의 시조 아담을 비롯해서 몇 사람에게 던지는 하나님의 질문이 있습니다. 이는 범죄한 인간의 실상을 일깨워 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의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1.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은 다음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 벗은 몸을 가렸습니다. 그러고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나무 그늘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1) 인간 계획의 어리석음을 일깨웁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불행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의 낙원을 그들에게 주어 살게 하였으며 모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마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간섭 없이 자기의 의지대로 행동하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그늘 밑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발상인지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려고 하였지만 풍랑 이는 바다에 빠지고 물고기 배속에까지 들어갔습니다(욘 1:15). 다윗은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시 139:8-10).

 

2) 하나님 앞에서 자기 위치를 점검합니다.

여기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심은 공간적 위치가 아니라 영적이고 신앙적인 현주소를 묻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과의 어떤 관계에 서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지음을 받은 피조물은 수직적인 관계일 뿐 수평적인 관계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담은 선악과를 먹는 날에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마귀의 꾐에 빠져 그대로 행동하고 말았습니다. 아담에게 접근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도록 충동한 마귀는 그렇다치더라도 거기에 현혹되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생각을 한 아담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분수를 모르고 교만한 생각을 하게 되면 언제나 마귀의 충동에 놀아나게 됩니다. 아무리 유능한 인간이라도 하나님께서 호흡을 거두시면 수를 셈할 가치도 없어집니다(사 2:22).

 

3) 범죄한 인간의 심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셨을 때, 그는 이미 불순종의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 마음이 닫혀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순수한 뜻으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지만 그는 하나님의 물음과 상관없이 제 멋대로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하였습니다(10절). 하나님께서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하였습니다(11절). 그때도 아담은 하나님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고 하였습니다(12절). 이처럼 범죄한 인간은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고 남에게 전가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2.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창세기 4:9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그의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최초의 살인을 불러왔습니다. 이후 ‘가인의 후예’들은 폭력과 범죄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앞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의 위치를 확인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가인에게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책임을 일깨워주는 질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실 때는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고자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사 43:7). 그것은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행위이지만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인간들을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하는 물음은 육친의 형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언어와 종족이 다르더라도 사람은 이웃을 형제처럼 사랑하고 도와주며 화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예배의 대상과 방법을 깨우쳐줍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과 갈등이 생긴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창세기 4:2에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고 하였습니다. 두 형제의 직업이 차이가 있는 것만큼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도 당연히 차이가 있었습니다. 3-4절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4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배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의 성향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구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3) 윤리적인 가치관을 깨우쳐줍니다.

가인은 동생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범죄를 저지르고도 이를 당연시 하였습니다. “네 아우가 어디있느냐”고 하시는 하나님의 물음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고 반항적인 대답을 하였습니다. 형제와 이웃 간에 사랑하며 돌봐 주어야 되는 본분을 거스르고도 그것을 오히려 정당시 여기는 자세입니다. 사람과의 윤리적 책임은 외면한 채 제사(예배)만 내세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멸시하였습니다(마 5:23-24).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는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을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들”이라고 매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잃은 자식을 맞이하며 기뻐하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면서 가까이 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눅 15:28-32).

 

3.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입니다.

창세기 16:8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첩 하갈에게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집을 떠나서 방황하는 인생을 향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실존에 관한 문제입니다.

 

1) 근본을 묻는 질문입니다.

하갈은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하시는 하나님의 물으심에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하갈은 자기가 거처하던 집과 그가 속했던 사람들에게서 떠나왔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살았던 아브라함의 집은 축복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성도에게 교회를 의미합니다. 다윗은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시 65:4). 아브라함이 없는 하갈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기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은 그의 근본을 묻는 질문입니다. 하갈은 아브람의 집에 거처하면서 사래를 섬기는 종입니다. 그것이 그의 근본이요, 정체성입니다. 성도의 근본은 하나님입니다.

 

2) 신분과 사명을 묻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본분과 사명을 망각하게 되면 살아가는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하갈은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사라는 자기가 출산을 하지 못하게 되자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취하여 아이를 낳도록 권했습니다. 하갈이 아브라함과 동침하고 임신을 하게 되자 그 주인 사라를 멸시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사라의 미움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과의 삼각관계는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잘못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하갈이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하갈은 주인을 섬기는 종으로서 자기의 신분을 망각하였습니다. 그가 집을 떠나면 종의 멍에를 벗고 자유로울 것으로 잘못 판단하였습니다. 성도가 섬기는 자의 본분을 망각하면 존재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3) 삶의 방향과 목적을 묻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가 가고 있는 목적지를 확인하는 질문입니다. 하갈은 스스로 자기의 여주인을 피하여 도망한다고 했을 뿐, 어디로 가는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자신도 지금 어디로 가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목적 없이 사는 인생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날 때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히 11:8)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목적 있는 여행을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은 목적 없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던 요나처럼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주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회복과 희망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9-1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