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설교

장년
예람지기 2009.06.14 00:00:00
876
  • 일자
    2009-06-14
  • 설교
    손상률 목사
  • 성경
    갈라디아서 5:1~1
구약의 이사야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사역을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 58:6). 이는 마귀와 죽음의 권세에 얽매여 있는 인류를 해방시키고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모든 것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멍에 아래 얽매여 신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당시 유대주의적 사고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율법의 멍에를 벗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 신자들 중에는 아직도 육체의 소욕에 얽매여 있어 옛사람의 멍에를 벗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갈 5:19-21). 그렇지만 성령의 열매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법에도 구속받지 않습니다(갈 5:23).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1. 성공의 강박증(强迫症)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였습니다(요 14:27). 자기의 목표에 이르고자 성취욕이 강한 사람일수록 주님의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성공을 위한 강박관념이 마음을 억누르기 때문입니다.

1) 물량주의(物量主義)적인 성공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서는 소위 ‘긍정적 사고’를 내세우며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등의 힘찬 구호를 자주 듣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세운 목표를 위해서 집념을 가지고 전력투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목표로 하는 성공의 기준이 어떤 것이냐는 문제가 더욱 중요합니다. 대부분은 물량주의적인 관점에서 성공의 기준을 세우곤 합니다. 자기의 목표에 도달하고 얼마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 만족하지는 못합니다. 더 많이 가져야 되고, 더 높이 올라가야 되고, 그것을 언제까지나 계속 누려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쫓겨 마음에 평안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것에 얽매여 있는 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로움을 누리지 못합니다.

2) 인본주의(人本主義)적인 성공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람의 눈만 의식하게 될 때 가치판단의 근본이 흐려지게 됩니다. 성도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지향하며 현세적인 것보다 내세적인 것에 비중을 두고 살아야 됩니다(롬 8:24-25). 현세적이고 육신적인 것은 모두가 잠시 잠깐 보이다가 곧 사라져 버리는 허무한 것들
이기 때문입니다(사 40:6-8). 신약의 야고보는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였습니다(약 4:14). 눈에 보이는 성공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거기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21).

3) 목표에서 빗나간 성공입니다.

목표 설정이 잘못된 사람은 그 하는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옛날 노아의 후손들이 저희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공명심이 발동하여 시날땅에 성과 탑을 쌓다가 결국 다 망하고 말았습니다(창 11:4). 그리스도인은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두는 자입니다(빌 1:20-21). 이와 같은 삶을 지향하는 사람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선한 일을 위하여 인생의 승부를 거는 사람입니다(딛 2:1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사는 사람은 최상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요담의 설교에 나오는 감람나무와 무화나무와 포도나무는 그들의 열매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에 존재의 의미를 두었습니다. 모든 나무가 찾아와서 왕을 준다 해도 그것을 마다하였습니다(삿 8-13).


2. 실패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성공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은 항상 실패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게 됩니다. 항상 남의 눈을 의식하게 되고 성공하지 못했을 때 오게 될 부담을 안고 살아갑니다. 실패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마음에 자유함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1)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율적(自律的)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만능(萬能)인 것처럼 자기를 과신합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스스로 자기의 신앙이 대단한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가 기도하면 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하거나, 자기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실패를 하는 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불완전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지나친 자기 과신으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갑니다. 세상이라는 한계상황 속에서 성공도 있지만 실패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솔로몬 왕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전 7:14).

2) 신앙적인 기준을 가져야 됩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시험을 하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마 4:3). 이 말은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거기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부당한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못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만이 축복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열악한 환경이나 신체적인 장애를 가졌으면서도 불행하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건강한 몸과 높은 지위에 누릴 것 다 누리고 살았던 사람도 인생을 포기하고 비극적인 종말로 끝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의 잘못된 가치관의 결과입니다.

3) 하나님의 주권에 승복하는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극렬한 풀무불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불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살려 주실 줄 믿었지만 혹시 그리 아니하시더라도 거기에 승복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단 3:18). 진실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것을 실패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평생의 소원인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그의 인생을 실패로 보지 않았습니다(신 34:10-12). 바울도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지 않았으나 거기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경륜을 발견하고 오히려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고후 12:9). 하나님께서는 나의 약한 그것을 통하여 원대한 그의 경륜을 이루십니다.

3.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자유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1) 죽음을 능가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요 11:25-26). 생명의 근원자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셨고 자신도 무덤 속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이를 근거로 우리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하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부활과 영생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고전 15:42-44). 모든 사도들과 역대의 성도들이 이 도리를 전파했고 또한 승리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복음이 가는 곳에 수없이 많은 박해와 죽음의 고통에 시달렸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승리하였고 주님의 교회는 여전히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2)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여유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오는 죽음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히브리서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죽음이 남녀노소 구분이 없고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릅니다. 젊은이의 죽음이나 청소년의 죽음같이 참으로 애석한 죽음도 있습니다. 이것도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갓난아이가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매달렸지만 끝내 아이가 죽는 것을 보고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고 하며 담담히 받아들였습니다(삼하 12:23). 나이도 젊고 할 일도 많은데 갑자기 죽음이 이르게 되면 안타까운 마음은 들지만 그래도 이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언제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면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3) 삶의 연장으로 삼아야 됩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죽음을 보지 않고 계속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의 몸과 정신은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잘 관리된 몸이라도 백년 이상을 살게 되면 육체나 정신의 여러 부분이 망가지고 쇠잔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활하는 몸과 영혼은 썩어지지 않도록 변화된 모습으로 영생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5:51-54). 영원히 사는 사람들의 공간은 지금과 같은 체질세계가 아닌 새하늘과 새땅입니다(계 21:1-4). 곧 예수님께서 예비해 두셨다는 천국을 뜻합니다(요 14:1-3).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고 영생의 고백을 하는 사람은 현세에서의 죽음을 통과의례로 생각할 뿐 그것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모든 매임에서 풀려나 참된 자유를 향유하며 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