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에 오셨습니다. 이 베다니는 예루살렘과 인접한 곳에 있으며(요 11:18), 예수님의 행적과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마 21:17, 눅 24:50). ‘베다니’라는 이름은 ‘괴로움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한편 ‘나사로’는 ‘하나님의 위로’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입니다. 그 이름들이 예수님께서 그곳에 오신 이유를 말해 줍니다. 죄와 마귀와 죽음의 권세에 지배당하는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처럼 캄캄한 절망 속에 주저앉아 있는 인간들에게 ‘달리다굼’의 소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교회가 전개하는 복음운동의 특징입니다.
1. 베다니의 나사로
베다니는 범죄한 인간이 사는 세상을 뜻합니다. 거기에 사는 나사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1) 질병이 있는 곳입니다.
요한복음 11:1에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고 하였습니다. 본서의 기자는 베다니의 실상을 나사로의 병으로 부각시켰습니다(요 11:3, 6). 질병은 신체 이상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생리활동에 고장이 난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신체의 기능에 장애를 가져오게 하는 육체적 질병이거나 또는 영혼과 마음의 기능을 고장나게 하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건 인간에게 정상적인 활동을 저해하는 것으로서 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그런데 세상을 사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구촌 어디에도 질병의 고통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 곧 ‘괴로움의 집’, 베다니의 현상입니다.
2) 죽음이 있는 곳입니다.
병으로 고생하던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11:11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고 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고 하였습니다(21절). 나사로가 겪고 있는 질병과 죽음은 세상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종말의 순서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편안하게 살던 사람도 결국은 질병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세상 그 어느 곳이든지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죽음의 세력이 상존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언제 밀어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마귀가 활동하는 이 세상의 정경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을 ‘괴로움의 집’, 베다니라고 이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3) 슬픔과 눈물이 있는 곳입니다.
베다니의 마르다 집에서는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픔과 눈물에 휩싸였습니다. 19절에 많은 유대인이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라고 하였습니다. 33절에는 예수께서 마리아 자매와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35절에는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현장에는 슬픔이 있고, 눈물이 있습니다. 이것이 베다니의 실상입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오는 질병과 고통, 죽음과 슬픔은 다 범죄에 따르는 징벌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5:12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왕노릇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현대판 베다니로 찾아오신 예수님은 죄와 죽음에 억눌린 사람들을 일어나라고 명령하시는 분입니다.
2. 무덤속의 나사로
죽은 나사로는 가족에 의하여 무덤에 장사지내졌습니다.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고 하였습니다.
1) 육체를 가두는 무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땅속에 굴을 파고 거기에다 시체를 장례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이 헷 사람에게 돈 주고 산 막벨라 굴을 가족묘지로 했던 것이 유래가 된 것 같습니다(창 23:17-18). 나사로의 경우도 세마포로 싼 시신을 굴속에 안치하고 입구를 큰 돌로 막아 두었습니다(38절). 죽은 사람의 시체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하여 처리됩니다.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무덤처럼, 이 세상에는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적인 제도나 관행 또는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하여 사람들은 억압과 구속을 받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하여 웅덩이에 들어갔고(창 37:22), 예레미야도 물 없는 구덩이에 갇혀있었습니다(렘 38:6). 이처럼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현실이 인간세계의 한계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보이지 않는 무덤이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곧 유대주의적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에 해당됩니다. 철학자 베이컨(F. Bacon)은 사람에게 네 가지 우상(Idola)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동굴의 우상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속에 주관적인 편견이나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정신적인 감옥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학문적 소양이 뛰어나거나,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자신감에 차 있는 사람일수록 자기중심의 철학과 독특한 가치관에 묶여버리고 맙니다. 성경은 인간의 ‘전적 부패’를 말합니다(시 14:1-3).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롬 7:21-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만 가지는 사고의 틀을 깨지 못하는 사람은 정신적인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3) 무기력(無氣力)증의 무덤이 있습니다.
일종의 자포자기(自暴自棄)내지 체념상태를 두고 일컫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육체의 고통으로 오는 문제나, 정신적으로 속박되어 있는 상황보다도 더 큰 회복불능의 불행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실 때,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고 하였습니다(39절). 이와 같은 마르다의 태도는 질병과 죽음과 슬픔으로 이어지는 베다니의 현실에 익숙해 졌고 또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상태입니다. 무덤 앞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무기력증의 무덤 속에 갇혀 버린 세상이기에 예수님께서 오셨고, 또 ‘달리다굼’을 명하셨습니다.
3. 일어나는 나사로
예수께서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고 하시는 말씀과 함께 그 사람의 손이 힘있게 내밀어졌습니다(막 3:5). ‘일어나라’고 하시는 달리다굼의 명령에 야이로의 딸도,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즉시 일어났습니다.
1) 말씀의 권세가 나타났습니다.
죽은 자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명령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생명의 원인자이기 때문입니다(요 11:25). 그분의 말씀 한마디에 죽음의
권세가 무너지고 거기 억눌려 있던 생명을 소생시키는 능력이 행사된 것입니다. 그분이 전능하신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요 1:3).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기사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있으라”고 하시면 그분의 명령대로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사자에게 이끌려 골짜기에 쌓여 있는 마른 뼈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분부에 따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하고 외쳤습니다. 그 말씀과 함께 생기가 들어가고 모든 뼈들이 살아서 일어났습니다(겔 37:1-10).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능력이 행사됩니다(시 19:7).
2) 은혜로 되어진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다음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부르실 때 무덤 안에서는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얼굴에 수건을 쓴 모습으로 걸어 나왔습니다(43-44절).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흔히 순종이라는 말을 할 때, 이것을 자기의 의지나 노력의 산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믿음에는 마땅한 행위가 따라야 하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일어서게 된 것을 두고 유대인들이 의아해 할 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고 하였습니다(행 4:10).
3) 복음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나사로의 사건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 큰 이슈로 등장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9에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고 하였습니다. 10-11절에는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고 하였습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님 되시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고전 1:18-23).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생의 소망을 줍니다. 이 복음의 특징이 지상교회를 통하여 달리다굼의 능력을 행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