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설교

장년
예람지기 2008.12.14 00:00:00
1010
  • 일자
    2008-12-14
  • 설교
    손상률 목사
  • 성경
    마가복음 6:34~44
갈릴리 바다 주변의 빈 들판에 수많은 군중이 모였습니다. 아이와 여인을 포함하면 2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 많은 인파였습니다. 그들은 온 종일 예수님과 함께 지냈으나 해가 저무는 그 시간까지 음식을 먹지 못하고 굶주린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고 실토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놓고 축사하신 다음 그것을 나누어주게 하여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여기 해가 저물어 가는 벳새다 빈 들판의 정경은 어쩌면 오늘 우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연말에 세계적인 경기불황과 경제난에 허덕이며 사람들은 춥고 배고픈 겨울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실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1. 어린이의 오병이어(五餠二魚)

요한복음 6:9에는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군중들의 배고픈 현실 앞에서 어린아이나 보리떡 정도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이 다 주님 손에서 쓰여졌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1) 물질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을 좋아하고 그것에 집착한 나머지 끝도 없이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을 가집니다. 물질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없는 사람은 많아야 가치가 있고 적은 것은 하찮게 여깁니다. 아무리 많아도 배금주의(拜金主義) 사상에 젖어서 거기 얽매여 살거나, 적은 것을 무시하는 태도는 잘못입니다. 문제는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있습니다. 엘리야 때 사르밧 과부는 한 번 먹고 없어질 가루와 기름으로 주님을 공궤하였습니다(왕상 17:8-16).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도 요긴하게 사용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하십니다. 무엇이나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의 정신을 발휘하여 더 많이 베풀고 섬기는 일을 해야 됩니다.

2) 믿음의 역사(役事)를 보여줍니다.

믿음에는 상상할 수 없는 역사(Work)가 일어납니다(살후 1:11). 예수님께서도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 17:20). 믿음은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 이상의 신비로운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하나처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계산에 밝은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요 6:7). 그렇지만 결국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많은 군중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수학이나 과학의 공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요소가 있습니다.

3) 결단과 용기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벳새다의 이적은 보리떡과 물고기를 내어놓은 어린이의 행동에서 비롯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과 신비를 인정하고 또 그것을 전파하기도 하지만 막상 자기에게 그런 상황이 오게 되면 이를 회피하거나 외면하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론적으로나 지식적으로만 받아들일 뿐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비는 십자가의 삶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먼저 자기를 부인하는 결단이야말로 십자가의 삶을 실천하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죽으면 살게 되고, 잃으면 얻게 되는 것이 십자가의 도리입니다(마 16:24-25). 예수님께서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2:24).


2. 순종하는 행동입니다.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에는 어디에나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벳세다 현장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따르며 순종한 사람들의 일사불란한 행동이 있었습니다.

1) 이름 없는 어린이

처음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님에게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요 6:9)고 했을 때 그 어린이는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어도 그 어린이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양식이었습니다. 그것을 내어주고 나면 저는 속절없이 굶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선뜻 내어놓았습니다. 분명히 자기 것이지만 그것을 자기 혼자만의 목적대로 쓰지 않고 예수님의 의도에 따라 제공할 수 있는 마음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크고 대단한 순종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서부터 주님의 말씀과 요구가 있을 때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행위입니다.

2) 말씀대로 섬기는 제자들

해가 저물어 가는 벳새다 빈 들에서 제자들은 참으로 난감한 지경에 처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고 하였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분부대로 백 명 또는 오십 명씩 무리를 지어 앉게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축사하신 떡을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거두어 열두 광주리에 담았습니다. 모두 다 예수님의 명령하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3) 백성들의 질서 있는 행동

광야에 모인 무리들은 끼니를 건너뛰며 굶주린 사람들입니다. 자칫 군중심리에 동요되어 큰 혼란과 무질서를 야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분부를 받은 제자들의 지도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행동하였습니다. 보잘 것 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그 많은 무리를 먹이겠다고 나설 때 자칫 냉소하며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다 이기적인 욕심에서 자기 몫만 챙기려고 혈안이 되어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외로 차분하게 질서를 지키며 순종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며 제자들의 사역에 협조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어려움과 위기에 처하더라도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희망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3.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5병2어의 이적은 복음서 기자가 공통적으로 취급한 사건입니다. 해가 저무는 빈 들에서 춥고 배고픈 군중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배불리 먹었으니 축복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됩니다.

1) 인간의 무능을 고백할 때

34절에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을 목자 없는 양 으로 묘사한 것은 당시의 사람들 모습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들은 삶의 목적도 방향도 없었고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우선 허기진 군중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되는데 당장 어떤 해결책도 없었습니다. 빌립의 계산대로 대략 200데나리온 이상 소요되는 돈이 없었습니다. 돈이 있다 하더라도 빈 들에서 동시에 많은 떡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날은 저물어 어둠이 깃들게 되면 춥고 배고픈 그들은 길에서 쓰러질 위험도 따랐습니다. 제자들은 하나같이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무능과 한계를 실감하는 상황입니다.

2)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존할 때

인간이 자신의 무능을 깨닫게 되면 불가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옛날 히스기야 왕은 산헤립의 군대의 포위망 속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오늘은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하고 실토하였습니다(왕하 19:3).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십팔만 오천이나 되는 산헤립의 군대를 다 죽은 송장이 되게 하였습니다(왕하 19:35). 역대하 16:9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부르짖는 사람을 위하여 크고 은밀한 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렘 33:2).

3)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

모세는 홍해 앞에서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한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4:14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인본주의의 상징인 애굽의 왕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출 14:31). 어느 때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일을 하십니다. 벳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굶주린 백성에게 배불리 먹이신 것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요 6:35).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때 그것이 백성에게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