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하늘을 논할 때는 공간이상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양적인 사고로 중요한 결정을 ‘하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나, 또는 ‘역천자(逆天者)는 망하고 순천자(順天者)는 흥한다’는 말에서 하늘은 인간이상의 절대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하늘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하였습니다(사 66:1). 이는 하늘이 하나님께서 계시는 좌소(座所)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셨고(요 3:13), 또 부활하신 후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행 1:11).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늘에 대한 동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며 궁극적인 소망으로 인식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한평생 나그네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오직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였던 것입니다(히 11:16). 사도 바울은 땅 위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라고 하였습니다(빌 3:20).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세상살이는 사실상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땅에 살면서도 하늘나라의 이상을 가지고 거기로부터 주어지는 황홀한 감격을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생애 가운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신비로운 체험을 많이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7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다고 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셋째 하늘에까지 이끌려갔던 일입니다. 여기 바울이 말하는 셋째 하늘의 환상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I. 셋째 하늘의 실제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하늘을 말할 때 땅과 대칭되는 개념으로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무한대의 광활함을 뜻하는 말로 이해하였습니다. 하늘을 히브리말로 샤마임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장엄하다는 의미의 복수형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열왕기상 8:27에 나오는 솔로몬의 기도문 중에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1) 영적 세계를 뜻합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늘에 대한 세 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하늘은 대기층 이라고 하여 지구표면의 대기권을 뜻하고, 둘째 하늘은 성군층(星群層)이라고 하는데 이는 별들과 천체의 세계인 우주공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셋째 하늘이란 영층(靈層)으로서 여기는 하나님의 보좌와 천사와 영물들의 활동공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2:19-20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영물들을 모아 놓고 어전회의를 하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4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천사를 그의 부리시는 영으로 사용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 바울이 체험했다고 하는 셋째 하늘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교제하는 영적인 세계를 뜻하는데 이를 본문 4절에는 “낙원”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래의 낙원(paradais)은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거주했던 에덴동산입니다(창 2:8). 이 낙원은 인간의 범죄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다음 그곳을 동경하면서 스스로 갈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백성에게는 낙원의 소망이 있습니다(눅 23:43, 계 2:7).
(2) 완성된 천국입니다.
계시록 21:1-8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지는 천국의 실제를 그려놓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를 “새 하늘과 새 땅”(new haven & new earth)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기존에 있었던 하늘과 땅과 바다가 다 없어져 버림과 함께 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곳을 거룩한 성 또는 새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곳의 아름다움과 복스러운 환경을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은 것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거기에서는 사람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거하면서 모든 즐거움을 같이 누리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는 죄의 오염이 없고 죽음이나 눈물 흘릴 일이 없이 그야말로 영생복락하는 곳, 이름 그대로 낙원(樂園)입니다.
(3) 마음의 천국입니다.
완성된 천국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곳이지만(요 14:1, 히 11:16) 실제적으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전에 먼저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해 놓으신 곳에서 낙원의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눅 16:22). 천국의 실제를 믿는 사람이라도 세상에 사는 동안은 낙원에 대한 이상향(理想鄕)을 가지고 있을 뿐 그것을 누리거나 체험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만 그 마음속에 천국의 환상을 가지고 표현할 수 없는 내적인 희열과 감격을 맛보며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는 질문을 받고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7:21).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그 마음속에서 천국의 실제를 느끼며 감격할 수 있는 신비적 체험이 있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이 간증하는 셋째 하늘의 실상도 그런 것입니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그 마음속에 천국의 환상이 있고 그 곳으로 행하는 대로가 열려져 있는 사람은 매우 행복한 사람입니다(시 84:5).
Ⅱ. 셋째 하늘의 체험
일찌기 예수님께서는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께 나아온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요 1:51). 기독교의 신비적 요소는 경건한 성도의 신앙생활 가운데 종종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 1절에서 바울은 그가 체험한 것을 “주의 환상과 계시”라고 하였습니다. “환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양을 뜻하는데 이는 주로 비몽사몽간에 체험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계시”는 감추어진 것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환상도 사실상 계시의 한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신인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체험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1) 말씀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였습니다(계 1:3). 히브리서 4:12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에는 이 말씀이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지니는 신비로운 특징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말씀과 함께 역사하는 성령의 강권적인 능력을 힘입게 되므로 증거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신령한 눈이 열리며 천국의 환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말씀을 들을 때도 신비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행 10:44-46). 밧모 섬에서 유배 중에 있던 사도 요한은 주일 아침 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하늘의 큰 음성을 듣는 순간 계시의 파노라마를 접하게 되었습니다(계 1:10).
(2) 기도하는 중에 일어납니다.
신앙생활에서 나타나는 신비적 체험은 주로 기도생활 가운데서 많이 일어납니다. 성령의 작용하심에 따라 방언을 하게 되고 이적이 일어나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입신의 경지에 들어가거나 황홀한 천당의 광경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산 위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그곳에 선 광경을 보았습니다(마 17:1-5). 이사야도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보좌와 천당의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사 6:1-5). 로마 옥중에서 에베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기도문 중에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엡 1:16-19).
(3) 사역의 현장에서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였습니다(마 11:29). 멍에를 메고 쟁기나 수레를 끌고 가는 소와 같이 묵묵히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주어진 사역에 충성하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의 신비를 맛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본 셋째 하늘의 실체를 14년 전에 경험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절). 그리고 그 때의 상황을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14년 전 그가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는 말에 대하여 학자들 중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나, 그 중 하나는 바울이 1차 여행 중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내버려졌을 때라고 말을 합니다(행 14:19). 그 말이 맞다고 한다면 그의 육체는 성 밖에 던져진 상태이지만 그의 영혼이 몸 밖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맛보고 황홀한 기쁨을 누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2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라고 했는데 그가 안다는 사람은 스데반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7:56에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간 성령이 충만하여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증언하였습니다.
Ⅲ. 셋째 하늘의 체험을 하게 되면
은혜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세계를 실감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옥중에 수감된 상태에서도 황홀한 하늘나라의 기쁨에 충만해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3:20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셋째 하늘의 신비를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그의 삶 가운데 하늘나라 시민권자의 특징이 묻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1) 은혜에 대한 감격과 겸손한 행동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 하늘의 신비를 맛보며 사는 사람은 분명히 특수한 신분의 사람인 것이 확실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셋째 하늘의 실체를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이 알지 못하는 낙원의 즐거움을 맛보는 사람이 그것을 자기 혼자만의 특권으로 생각하여 자칫 우쭐대고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이런 일은 고린도교회 안에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무시하는 등 큰 분쟁으로 작용한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고전 12:29-31). 사도 바울의 경우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7절). 하나님의 은혜인줄 아는 사람은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2) 담력과 확신을 가집니다.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이 세상이라는 거친 토양 위에서 때때로 심한 고난을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자칫 약해지거나 주저앉을 수 있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낙원의 신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천부장의 영문에 갇혀 있을 때 40명이나 되는 특공대가 그를 죽이려고 매복해 있었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담대하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행 23:11).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내버려졌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셋째 하늘의 환상을 즐기게 해 주셨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바울은 제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며 담대한 마음으로 격려하였습니다(행 14:22).
고린도전서 11:23절 이하에도 그가 수없이 겪은 고난의 내용과 함께 셋째 하늘에 이끌려갔던 사실을 소개하므로써 담력과 확신을 더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낙원의 환상이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담대함과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3) 증거자의 삶입니다.
그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환상을 품고 천당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증거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소년 선지 예레미야를 부르시고 그에게 환상을 주었습니다(렘 1:11-13). 신령한 눈을 열고 하나님의 심오한 계시의 환상을 발견한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를 견고한 성읍, 쇠기둥과 놋성벽이 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렘 1:18). 이는 난공불락의 성벽처럼 세상 끝날 까지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고난과 죽음을 감수하고라도 끝까지 이겨내는 승리의 간증자가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고전 15:57-58).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요 빛의 간증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빌 2:15). 때때로 눈앞이 캄캄한 역경에 부딪치고 숨 막히는 절망의 계곡을 통과하게 되더라도 그리스도의 밝은 빛으로 조명을 받기 때문에 승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 낙원의 환상을 품고 승리의 간증자들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