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설교

장년
예람지기 2006.04.16 00:00:00
1384
  • 일자
    2006-04-16
  • 설교
    손상률 목사
  • 성경
    누가복음 7:11~16
 

나인성 입구의 도로상에는 두 가지 행렬이 마주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나인성 안에서 죽은 청년을 상여에 담아 사람들이 메고 나오는  장례식의 행렬입니다. 죽은 자의 어머니인 과부를 중심으로 이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슬픈 빛을 띠고 절망의 현장인 공동묘지로 향해 갑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죽음과 슬픔이 있는 이곳 나인성을 향하여 들어오는 행렬입니다.
잠시 후 두 행렬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상상 못한 상황이 이루어졌습니다. 시체를 메고 무덤으로 가던 죽은 자의 행렬은 예수님 앞에서 멈추어 서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향하여 손을 내밀면서 “청년아 일어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 즉시 청년은 살아났고, 죽은 자의 행렬은 부활과 생명의 행렬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나인성 입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가지 행렬의 만남은 생명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전개하는 복음운동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세상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제각기 다른 목적과 방향으로 달리는 두 가지 부류로 구분하였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원수가 되어 멸망으로 향하는 부류인데 이는 땅에 속한 그룹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목표를 두고 그의 길을 행하는 부류로써 이는 하늘의 시민권자 그룹이라고 하였습니다(빌 3:18-21).
여기 본문 성경에 나오는 두 그룹의 행렬과 만남, 그리고 새로운 양상으로의 전개과정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생명운동의 실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뜻 깊은 부활절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의 행적을 통하여 기독교의 부활진리를 교훈 받고자 합니다.



 I. 죽음의 행렬입니다.

 죽은 청년의 시체를 메고 무덤으로 향하는 장례의 행렬을 말합니다. 12절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1) 죽음 아래 있는 인생들

어느 시대나 어느 지역이나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죽음이 있고 죽은 자를 처리하는 장례문화가 있습니다. 여기 나인성에서 나오는 장례행렬은 그 시대 그 상황에서 시행되는 장례문화의 일면일 것입니다.
본문 말씀 12절에는 죽은 사람은 어미의 독자요, 그 어미는 홀로 사는 과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처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성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그 행렬에 동행하였다고 했으니 그 어머니는 그 곳 사람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어머니를 동정하고 위로하려 하였겠지만 그 어머니가 당하는 죽음 문제를 면하게 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은 누구나 죽음을 피하고 싶었지만 예외 없이 당하고 말았습니다. 과부의 독자라고 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히 9:27).

(2) 절망과 허무입니다.


구약의 이사야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하였습니다(사 2:22). 살아 있을 때 큰 소리치고 무슨 일이나 다 할 것처럼 자기를 과시하다가도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다다르게 되면 좌절하고 낙망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사람을 ‘허무와 죽음에 내동댕이쳐진 인생’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고 하였습니다(전 3:19).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 죽는 사람에게 예절을 갖추어 격식 있는 장례식을 거행하곤 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들이고 많은 사람이 모여서 화려한 장례식을 치르더라도 그 결국은 무덤 속에 들어가거나 화장장에서 연기로 사라지고 한 줌 재만 남겨질 뿐입니다.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던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Louis XVI)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위에서 밀려나 많은 왕족들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가 죽기 전 갇혀 있었던 바스티유(Bastille) 감옥의 벽에다 손톱으로 「허무」라는 글자를 새겨두었더라고 합니다.

(3) 인간의 한계를 실감케 합니다.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박사는 「죽음에 포위된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힘으로 거기서 헤쳐 나오거나 그 시간을 지연시킬 수도 없습니다. 「나인」이라는 지명은 「아름답다」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사람들의 희망사항은 죽음도 질병도 슬픔도 없는 아름다운 고장이 되기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지혜라고 일러줍니다. 전도서 7:2-4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죽음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실제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순간마다 자기의 삶을 점검하며 후회 없는 걸음을 걷게 됩니다. 옛날 마게도냐의 빌립(Philips)왕에게는 자기에게 죽음의 사실을 알려 주는 신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신하는 하루에 한 번씩 왕에게 나와서 ‘폐하! 언젠가는 돌아가십니다. 그 사실을 명심하십시요’하고 직언하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왕은 죽음 앞에 서 있는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자세를 가다듬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우리 날 계수함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시 90:12).

Ⅱ. 생명의 행렬입니다.

11절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평소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호감을 가지고 따르던 무리들이 이 행렬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맞은 편 나인성에서 나오고 있는 행렬은 죽은 청년을 장사지내기 위하여 무덤으로 행하는 죽음의 행렬인데 반하여 여기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이 행렬은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가고 있는 생명의 행렬인 것입니다.


(1) 생명의 주님이 계셨습니다.

맞은편에서 오는 죽음 행렬은 아무래도 상여에 들어 있는 죽은 청년이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고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렬은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생명의 본체라고 말했습니다. 곧 생명의 근원자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3-4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1:25).
사도 바울은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고 하였습니다(골 3:4). 예수께서 생명의 주님이기 때문에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입니다.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죽음과 마주 부딪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용맹하고 담이 큰 사람도 죽음의 행렬을 바라보며 마주치려고 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과 상관없는 분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사랑과 긍휼의 주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그 사건을 엄청난 이적이요 신비라고 합니다(요 1:14). 이것은 무엇보다도 죄와 죽음의 불행 아래 있는 인생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3:16).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으신 분이고 죽음과는 더욱 더 상관없는 분이면서 죽음의 공포 아래 있는 인류를 위하여 그 현장으로 직접 오셨습니다. 히브리서 2:15에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질병으로 신음하는 환자들의 집합소인 베데스다 연못가에 직접 찾아 가셨습니다(요 5:1-9). 가장이요 오라비인 나사로의 죽음으로 큰 슬픔에 통곡하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가셨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는 냄새를 풍기는 무덤 속까지 들어가셨습니다(요 11:38-44).
본문 말씀 13절에도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죽음의 현장, 슬픔의 현장을 직접 찾아주시며 위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감할 수 있게 됩니다.

(3) 부활의 권세를 행사하였습니다.

독자의 죽음 앞에서 비통해 하는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위로하신 예수님께서는 시체를 향하여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고 명령하였습니다. 그 즉시 죽었던 자가 살아서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습니다(15절). 예수님의 명령 한 마디에 죽음에서 살아나는 능력이 행사 되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도 사람들이 소리 내어 울고 심히 통곡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며 「달리다굼」하고 일어나게 하였습니다.「달리다굼」이란 말은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뜻입니다(막 5:38-43).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는데 그 즉시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가 세마포에 묶인 채로 일어나서 움직였습니다(요 11:43-44).
 이처럼 예수님에게는 죽음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죽은 자를 살려 내는 권세가 있습니다. 이는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증명하는 것입니다(요 11:25).


 Ⅲ. 두 행렬의 만남입니다.


서로 상극 관계에 있는 두 세력이 맞부딪치게 되고 충돌하게 되면요란한 파열음을 나타내곤 합니다.
가령 대기권에서 상반된 구름과 기상의 흐름은 태풍을 일으키게 되고, 바다 밑에서 요동치는 지각 판의 충돌은 쓰나미와 같은 재앙을 몰고 오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수없이 반복되어온 전쟁의 역사도 이와 같이 적대 세력 간의 충돌이었고, 그 결과는 대부분 파괴와 멸망을 초래하였습니다.
여기 나인성 입구 도로상에서 이루어진 죽음과 생명의 만남도 출발점과 종착점이 상반된 상극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이후 또는 기독교 복음이 나아가는 노정에서 어디서나 부딪쳐지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관계를 두고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였습니다(요 1:5). 그렇지만 빛은 어두움을 정복하게 되고 어두움은 빛 가운데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빛은 생명이고 어두움은 죄와 죽음의 세력을 뜻합니다(요 1:4).
여기 나인성 입구에서 마주친 두 행렬의 만남은 결국 죽음의 행렬이 예수 그리스도가 주도하는 생명의 행렬에 의하여 무산 되었습니다.

(1) 사망이 이김에 삼킨바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4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현대인들이 말하는 불안의 요소 중 흔히 「문명의 충돌」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권의 문명이 대립하면서 인류의 파멸을 불러올 것 같다는 불길한 징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문제가 정치적 이해관계나 또는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빚어질 때는 예측불허의 파멸로 가게 되지만,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복음운동에 따르는 것이라면 그 결과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결판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이후 예수 그리스도가 주도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운동은 지구촌 곳곳에서 반대세력과 맞부딪치며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사망이 이김에게 삼킨바 되는 기독교 복음의 승리로 판정이 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체이며 죽은 자를 살려 내는 부활의 능력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2) 생명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두 행렬이 만난 지점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죽은 청년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죽음의 행렬은 소멸되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 이상 그들이 공동묘지로 가야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결국 그 행렬은 모두 소리 없이 예수님의 행렬에 흡수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는 기독교 복음의 생명력이 모든 죽음의 세력을 흡수하고 변화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도리를 논증한 사도 바울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5:51-53).

(3) 부활신앙의 소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에는 상극 관계에 있는 것이 만나서 합하게 되고 상승작용을 하다가 더 큰 멸망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면 그 상대가 어떤 것이든 간에 생명적 연합으로 큰 소망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 그대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고전 15:54). 죽은 청년의 시체를 앞세우고 무덤을 향해 가던 나인성 사람들의 행렬은 죽음이라는 인생의 가장 무거운 명제를 안고 침울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 문제의 해결책을 가지고 그곳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행렬이야말로 그 자체가 곧 응답이요 가장 큰 소망입니다. 그들의 만남 가운데 죽은 청년이 일어나고 문제의 근원은 해결되었습니다. 15절에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라고 하였습니다. 그 어미는 자기 품에서 죽은 청년이 예수님의 품에서 다시 살아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감격을 안았습니다.
16절에는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현장을 목격한 자들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진수인 부활의 신비를 맛보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은 당연합니다. 부활의 신앙을 확인하게 되면 죽음 같은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과 고난은 부활과 영광으로 이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