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설교

장년
예람지기 2005.11.13 00:00:00
1167
  • 일자
    2005-11-13
  • 설교
    손상률 목사
  • 성경
    마태복음 16:24~28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 26절에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세상에 그 어떤 것하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목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목적도, 삼 년 동안 제자들을 훈련시키시고 사명을 주신 것도 모두 사람의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의 지식이 발달하고 첨단 문화의 이기를 누리면서도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존엄성이 모든 가치의 기준에서 밀려나고 있습니다. 삭개오를 찾아가신 예수님께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9:10). 또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세상으로 내어보내시면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였습니다(마 10:6).
이것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향해야 될 가치의 기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역사의 관점도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구속사(救贖史)적 경륜에 표적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정치나 경제, 사회, 문화, 예술과 같은 일련의 사안들이 생명을 위한 수단일 뿐 생명보다 우선시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생명의 윤리가 실험실의 도구처럼 전락하기도 하고 물질이나 권세나 명예의 그늘에서 버림을 당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시는 생명의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면서 그것을 지켜 나가야만 하겠습니다.


 I.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또한 만물의 영장이 되는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27-28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1) 흙으로 육체를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 다른 것은 다 말씀만으로 “…이 있으라” 하시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지으실 때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하면서 사전 기획을 하셨습니다. 거기 따라 흙으로 사람의 형체를 만드신 것입니다. 흙이란 사람의 육체가 된 원소를 뜻합니다.

(2) 생기를 주었습니다.

창세기 2:7에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하였습니다.
신학적으로 사람의 구성요소를 육체와 영혼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부합되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기”는 기운, 또는 성령을 뜻하며 “생령”은 살아 있는 영으로 동물과 구별되는 불멸의 영혼을 의미합니다(고전 15:45).
 하나님께서 각종 동물들도 흙으로 지었다고 하였으나(창 2:19), 그들에게는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영혼의 기능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르는 것으로서(창 1:26) 우리 안에 있는 종교적 성향이나 거룩을 지향하는 본성이 포함됩니다(롬 1:19).

(3) 만물의 영장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에게 만물의 지배권을 부여하셨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세를 대행하면서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창 1:18). 이는 인간에게 부여된 왕적 권세요 제사장적 권세입니다. 죄가 개입되지 않은 낙원에서의 이런 요소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구도대로 이루어져서 본래의 진선미(眞善美)를 연출하였습니다. 창세기 1:31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였습니다 .


Ⅱ. 거듭난 생명입니다.

아담의 자손으로 똑같은 자연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자녀”, 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의 도리를 묻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3:3). 이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요 3:6-7). 예수님께서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고 하신 것은 거듭난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입니다.

(1)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원죄 아래 있는 인간은 모두 죄와 마귀의 권세 아래 얽매인 자입니다(롬 5:17).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기서 풀어내시고 자기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에베소서 2:1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풀어내시는 데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에베소서 1:7에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19에도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속전(贖錢)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그런 관계이고 보니 하나님께서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롬 8:32).
(2) 성령으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너무나 소중히 여기시므로 항상 성령으로 인도하시며 보호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8:10). 로마서 8:14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16에는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고 특별한 방법으로 관리하셨습니다. 신명기 7:6에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셨습니다(출 40:38).

(3) 영원한 나라의 시민입니다.

누가복음 12:32에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그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지키시며 보호하여 주십니다. 그것은 환난과 시험이 많은 자녀로서 흠없고 순전하며 빛으로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빌 2:15). 결국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를 상속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25:34).
세상 나라는 아무리 화려하고 좋아보여도 죄로 오염된 것이며 결국 멸망하여 폐기 되고 말 것입니다(요1서 2:15-17). 세상 끝날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하늘과 새땅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때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천당의 실세가 되어 영원한 나라의 기업을 같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계 21:27).


Ⅲ. 헌신된 생명입니다.

헌신 된 자란 하나님께 바쳐진 자를 뜻합니다. 구약시대 사무엘처럼 나실인 제도를 통하여 나기전부터 부모가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삼상 1:11). 이런 경우는 그의 생명이 완전하게 하나님의 소유로 인정되어 하나님만을 위하여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서 되어 집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헌신되는 자는 사람이 하나님께 서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정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고 하시며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렘 1:5, 7).
이렇게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쓰시는 그를 훗날 난공불낙의 견고한 성읍, 쇠기둥과 놋성벽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렘 1:18). 이사야 43:1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3:4에는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2) 특수한 목적이 있는 자입니다.

연출가가 드라마나 어떤 작품을 기획할 때 주인공으로 선택한 자를 어떤 경우에도 보호하고 부각시켜 줍니다. 그가 의도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주인공이 그 역할을 잘하게 하고 그 활동공간을 넓혀 주어야만 됩니다. 하나님께서사도 바울을 헌신자로 세우시면서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행 9:15).
훗날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천부장의 영문에 감금되어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의 곁에 서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행 23:11). 도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부르신 종이거나 거기 따라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배려하시고 간섭하십니다.

(3)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는 사람입니다.

  이사야 43:21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수종드는 사람이거나 찬양을 드리는 성가대원들도 그 복장과 위치를 높여주고 품위를 돋보이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보배처럼 존귀하게 여기고 하나님께서 애지중지 살피시는 것은 자기의 신실함을 나타내는 일이요 명예를 보존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에서 금송아지우상을 만든 일로 하나님의 징벌이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만약 여기서 이스라엘을 멸해 버리신다면 열방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애굽에서 인도하였다고 말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신실성을 잃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출 32:11-12).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사자 굴에 들어간 다니엘을 보호하셨고(단 6:23-27), 세 소년을 풀무불에서 살려내셨습니다(단 3:24-30).


Ⅳ. 가치 있게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사람은 거기 걸맞게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13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천하보다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맛 잃은 소금처럼 스스로 그 가치를 떨어뜨리고 천덕꾸러기처럼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여야 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우리의 생명을 천하와도 바꿀 수 없이 존귀하게 해 주신 것은 우리에게 조건이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는 사람은 그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5:10).
어느 때나 성도의 감사는 하나님께 찬송드리고 예배하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시편 116:12-14에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2)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신 율법의 강령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눅 10:27).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이웃 사랑에 대한 실제적인 교훈을 하셨습니다(눅 10:30-37). 그 비유 중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곧 길가는 사람에게 돈을 빼앗고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반 죽게 만든 강도가 있고, 다른 하나는 그 현장을 보고도 이를 외면한 채 피하여 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이며, 세 번째 경우는 그 불쌍한 사람을 자기의 짐승에 태우고 주막에 데려다주며 뒤를 돌봐주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마귀의 상징인 강도 같은 존재는 아니라 하더라도 불행한 이웃의 소리를 외면하고 자기의 안일만 추구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사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살아갑니다.

(3) 자기의 삶에 보람과 긍지를 가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것으로 자랑을 삼으며 자기를 과시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은 오히려 그런 것을 배설물처럼 여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에 거기서 얻는 희열과 기쁨으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빌 3:8). 하나님께서 자기의 가치를 천하보다 더 귀한 것으로 인정해 주시고 또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그것으로 무한한 보람과 긍지를 가지게 됩니다. 모세는 지나온 한평생을 회고하면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자기의 인생을 자랑하였습니다(신 33:29).
바울은 죽음이 임박한 순간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하며 승리의 개가를 불렀습니다(딤후 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