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찾아와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하고 물었습니다(마 11:3). 그 때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향해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고 하였습니다(마 11:7).
광야의 선지자 요한은 스스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 하며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날들을 요한과 함께 하며 듣고 배운 사람들이 막상 주인공 되는 예수님 앞에서 오실 그이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할 일도 없이 광야로 많이 몰려다니곤 하였습니다. 갈릴리 바다 근처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실 때도 오천 명이 넘는 장정들과 많은 부녀자들과 아이들이 몰려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때의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서 휩쓸려 다니는 사람이었고, 뚜렷한 이유나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떡을 먹고 배부른 군중이 예수님을 임금삼자고 들뜨게 하다가도(요 6:15), 잠시 후에는 썰물 빠지듯이 모두가 예수님을 떠나가기도 하였습니다(요 6:66).
이와 같은 현상은 오늘날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무리가 운집하여도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이나 욕구가 다르기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나왔느냐?” 고 물으신다면 대답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 광야에 나온 무리들의 성향을 보면서 우리들의 신앙상태를 점검할 수 있기 바랍니다.
I. 떡을 먹기 위해서 나온 무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과 물고기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게 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그곳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전날 떡을 먹었던 그 장소로 또 나가서 예수님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수소문하여 가버나움까지 와서 예수님을 보는 순간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하고 반갑게 인사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고 하였습니다(26절).
(1) 배고픈 사람들
우리말에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든지, ‘수염이 석자 오치라도 먹어야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곧 아무리 좋은 구경도 배가 고프면 못한다는 뜻이며, 아무리 지체 높은 벼슬아치도 먹는 문제가 해결 안 되면 곤란하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시절을 살아온 사람은 배고픈 설움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잘 압니다.
우리 사회가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배고픈 고통을 모르기 때문에 옛날 어른들이 체험한 「보릿고개」나 「초근목피」 또는 「조반석죽」같은 말의 의미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어서 국가적으로는 자주독립을 희구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모두가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어서 굶주린 배를 채우는 일이 가장 급선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찾아 나온 무리들의 사정을 잘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당장 배를 채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마가복음 8:1-2에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2) 물질적인 가치관
영혼의 가치나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한 사람은 세상 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합니다. 유물론적 철학의 이론을 정립한 칼 막스(K. Marx)나 엥겔스(Engels) 같은 사람은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라」는 논리로 한 때 국제공산주의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이 자기의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기며 땅에 일만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세상나라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심지어 예술이나 문화까지도 그 추구하는 목적이 경제문제로 귀결됩니다.
이와 같은 배금주의 또는 물질만능주의의 사고가 팽배하여 종교의 이상으로까지 파급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교회로 찾아 나오고 입으로 주님을 부르는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번영과 세상 적으로 형통케 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일부 교회들은 전도된 가치관에 덩달아 교회를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기관으로 오도하고 있습니다.
(3) 물질과 생명의 관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산상보훈을 강론하시면서 천국시민이 가지는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일러 주셨습니다(마 5:1-12). 한편으로는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현세적인 요건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대목이 있습니다(마 6:11). 성경은 성도가 육신생활에 필요한 물질을 외면하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기 위해 손으로 수고하며 주야로 일한다고 했으며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습니다(살후 3:8-10). 그렇지만 물질이 생명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재물이 사람의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일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25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하였습니다.
Ⅱ. 표적을 보기 위하여 나온 무리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6:2에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움직이시는 곳에는 언제나 많은 무리들이 따랐습니다(눅 19:3).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교훈에 감화되고 매력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마 7:28-29). 그러나 대부분은 주님이 행하시는 이적에 경이감을 가지고 기이히 여겼으며 그중에도 신체적인 악조건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병 고침을 받고자 소원하였습니다(마 9:21).
(1) 표적을 구하는 세대
사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22). 마태복음 12:38-39에 보면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표적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시대 저희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 나타났던 하나님의 신비로운 능력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고전 10:1-4). 그런 전통 때문에 예수님에게도 하늘로부터 내려온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마 16:1). 예수님께서도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였습니다(마 11:5).
(2) 표적이 주는 유익
예수님께서는 그가 행하시는 표적들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 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1:5). 또 초대교회 성령 받은 사도들의 행적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표적들도 그것을 통하여 성령의 다양한 은사와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고전 12:4-7).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내어보내실 때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막 16:17-18). 이 말씀대로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여러 가지 표적을 행하며 세계 도처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도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에서 여러 가지 은사와 표적이 나타나곤 하는데 이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또 신실한 성도들은 성령이 들어 쓰시는 도구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성령의 능력과 신비로운 은사를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3)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합니다.
평소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표적을 보이셨던 곳의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1:20-21에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으로 보아 이적 그 자체가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표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라고 보아야 마땅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22-24).
하나님의 교회가 지니는 가장 큰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며 이로 말미암아 죄인이 회개하고 구원받게 되는 것이 최상의 표적입니다.
Ⅲ. 영생을 위하여 나온 무리입니다.
27절에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광야로 나온 자들은 경위야 어떻든지 결국 예수를 만난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서 육신의 양식인 떡도 먹었고 신비로운 표적도 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 광야에 나온 목적을 이루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곳에 오신 예수를 붙들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1-12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1) 영생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떡을 먹고 표적도 보고 한 때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옹립하자고 들떠 있던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요한복음 6:67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었습니다. 68절에는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제대로 된 대답입니다. 똑같은 상황 아래서도 제자들은 영생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광야에 나온 목적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리떡과 물고기로 세상적인 양식을 얻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영원히 사는 생명의 양식을 얻은 것입니다. 신명기 8:3에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2)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우리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제자들은 빈들에서 천국시민의 특권인 상상보훈을 들을 때나, 오병이어의 신비를 체험하는 이적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시인하며 고백하였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 16:16).
어느 때나 은혜 받은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오랜 세월 교회생활을 통하여 보고 듣고 아는 것은 많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냥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으로 가볍게 생각합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갈지라도 예수를 만나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확신을 가진 것이야말로 최상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사람은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행 4:12).
(3) 자기의 사명을 인식하게 됩니다.
수가성 여인은 우물가에서 생수의 주인공이신 예수를 발견한 후 물동이를 내버리고 마을로 내려가서 만나는 사람에게 “와 보라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며 선전하였습니다(요 4:29). 나다나엘은 친구 빌립의 손에 억지로 끌려나왔지만 예수를 보는 순간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후로 그는 하늘이 열리는 환상과 함께 더 큰일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요 1:46-51).
이런 경우는 매우 소수의 사람에 한정된 것입니다. 광야에 나온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이적을 보았고, 떡으로 배를 채우며 기뻐했지만 아무런 결과 없이 돌아갔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면서도 그의 메시야적 능력을 몰랐으며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고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을 외면하였습니다. 예수가 구세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신앙고백이 안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하고 고백한 사람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라”(마 28:18-20)고 하시는 주님의 분부를 받들었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는 명령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만나 신앙고백을 하고 자기 사명에 충실 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