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설교

장년
예람지기 2005.04.03 00:00:00
1654
  • 일자
    2005-04-03
  • 설교
    손상률 목사
  •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1:1~8
 

기독교 역사에는 전설적인 미담과 훌륭한 업적을 남긴 아름다운 교회들이 있습니다. 지상교회의 산실인 예루살렘교회나 세계선교의 문을 열었던 안디옥 교회, 그리고 환난 시대에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순교자를 배출한 서머나 교회, 또는 예수님의 칭찬과 축복의 약속을 받은 빌라데비아 교회 등 자랑스러운 이름들이 있습니다.
세기의 전도자 바울은 성령의 강권적인 인도하심에 따라 소아시아에서부터 마게도냐와 로마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석권하며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가 에게해를 건너 유럽지역의 모 교회인 빌립보 교회를 설립한데 이어 두 번째로 세운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7:1-4에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불과 세 안식일 동안 성경을 강론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성경의 핵심 내용인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도리를 풀어서 가르쳤는데 그 결과 헬라인의 큰 무리와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교회가 훗날 자랑스러운 세상에서 가장 모범된 교회로 소문이 났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의 설립기념일입니다. 1946년 4월 3일 첫 예배를 드린 지 만 59년 되는 생일입니다. 설립 60주년(회갑)을 맞이하는 중요한 시점에서 우리는 지난날의 역사나 전통을 자랑하기 보다 다음 시대를 열어 가는 교회로서의 책임과 비젼을 제시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바울이 지적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우리가 전개하는 미래지향적인 교회의 이정표를 삼고자 합니다.

 

 Ⅰ. 구별된 자의 집단입니다.

본문 말씀 1절에 이 편지의 발신자인 사도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란 그리스도 교회의 성분을 규정짓는 말입니다.

(1)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은 개인적인 소양이나 성분이 다양합니다. 계층과 신분이 다양하고 언어와 종족도 각양각색이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라는 말의 히브리어 「카알」은 원래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소집하는 나팔소리를 의미합니다.
신명기 4:10에 “네가 호렙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의 혈통으로서 민족적인 부름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이것은 이방 백성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상의 특권을 포함합니다.

(2) 복음의 능력을 행사하는 사람입니다.

5절에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자랑스럽게 소개하며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이유는 그들에게서 복음의 능력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복음을 말이나 지식으로만 나타내려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17). 그는 또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4:19-20).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말로 복음을 전했으나 그들은 믿음과 성령의 은혜로 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3)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사람니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에 주시는 최상의 축복입니다. 초대교회에 보낸 사도들의 서신에는 대부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라는 말로 축복을 선언하였습니다(엡 1:2).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 인정받은 자에게는 반드시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평강을 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강이 복 인줄은 알면서 은혜가 복 인줄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거기에는 평강의 복이 따라가게 하셨습니다. 곧 은혜 받은 결과가 평강이며  평강의 근거는 은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가 아닐 때 인간이 추구하는 평강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조건이나 환경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축복입니다.


Ⅱ. 구속받은 사람의 집단입니다.

1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교회의 신약적인 의미로서 언어나 종족이나 국경에 구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담의 혈통에서 출생한 자연인은 예외 없이 죄 아래 있는 자요 죽음에 얽매인 자라고 하였습니다(롬 5:14).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사죄함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자들입니다(롬 3:23-24).

(1) 그리스도로 옷입은 사람입니다.

창세기 3:21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눈이 밝아져서 저희가 벌거벗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후 그들은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으나 그것은 죄로 인한 그의 수치를 가리우지 못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가죽옷으로 완전하게 그들을 덮어 주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로 속죄의 옷을 입혀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사람은 성별된 사람입니다. 로마서 13:14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계시록 19:8에는 성도의 착한 행실을 깨끗한 세마포로 비유하였습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은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로 연합된 지혜입니다. 신약적인 의미에서 교회를 사람의 몸에다 비유하는데 이는 머리를 중심으로 서로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뜻입니다(엡 4:15-16). 갈라디아서 3:2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각자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모두 다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 없이 연합하고 교통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3:28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였습니다.

(3) 사명을 공유한 사람입니다.

지상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도적 신앙과 전통을 계승하는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2:20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건전한 교회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도 이와 같은 신앙의 원리를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전통적인 개혁교회는 거룩성, 통일성, 보편성, 사도성을 교회의 특징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중 사도성(使徒性)은 사도들의 사역을 계승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일 곧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 28:19)하고 명령하신 복음 전파와 제자 삼는 일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주체가 되는 모든 성도들이 공유하는 사명입니다. 중세기에 기독교가 세속화되었을 때 성직자와 신자들을 구분하고 예수님의 사역이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요 특권인 것으로 오도했을 때 개혁자들은 이를 타파하며 「평신도 제사장」의 원리를 제창하였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연합된 공동체는 목회자나 평신도에 구분 없이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똑같은 사명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은 다같이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따라 전도하여 제자를 삼는 증인의 역할과 에수님처럼 섬기며 봉사하는 헌신자의 사명을 다해야만 되는 것입니다(마 9:35).

 

 Ⅲ. 역사에 귀감이 되는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가 전도하고 세운 교회와 그의 사역에 동참하는 많은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모두 그에게 기쁨이 되거나 자랑거리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걱정을 끼친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가령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에 얽혀 있었고(고전 1:10-11), 갈라디아 교회는 할례파 이단 문제로(갈 1:6-9), 에베소 교회는 교회론의 문제(엡 4;1-6), 골로새 교회는 기독론에 관한 문제(골 2:20-23) 등 교회마다 편치 않은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에게 오히려 기쁨을 주고 자랑거리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에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지상의 교회들 중에 모범으로 내세우며 다른 교회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소개하였습니다.

(1) 균형 잡힌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절에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올바른 신앙은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거나 극단적인 삶의 방향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면을 보면서 균형을 맞추어 나가야 됩니다. 개인의 경우도 믿음과 지식이 겸전된 온전한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엡 4:13). 하나님께로 향한 경건과 사람들에게 대한 자기의 임무에 충실하여야 됩니다. 곧 기도와 말씀과 예배생활 등 영혼을 깨끗하게 관리하며 거룩한 삶을 지향해야 되지만 동시에 가족을 돌보며 직장이나 사업 등 세상일에도 등한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균형 감각을 가지고 믿음을 생활 속에 실천하며 영혼과 육신이 건강한 복을 누려야만 됩니다(요3서 1:2).
여기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겸전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또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괴리가 없는 신앙을 실천했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앙망하는 신령한 삶을 뜻하는 것이며, 사랑은 이웃을 향해 수고하고 봉사하는 모습이며, 소망은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현재의 고난을 참고 견디며 자기를 관리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2) 환난을 통과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사도행전 17:1-9에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3주 동안 전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때 유력한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가 성장할 계기가 되었으나 곧이어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신자들을 끌고가서 매를 때리며 감옥에 가두는 등 위험에 직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베뢰아 지역으로 피신을 하였습니다. 바울과 헤어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유모의 젖을 잃은 아이처럼 애처럽게 여겨졌으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잘 양육되었습니다.
본문 말씀 6절에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는 그침 없이 시험과 환난을 겪게 됩니다. 교회는 역경을 통과하면서 더욱 부흥되고 성도의 신앙은 환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연단을 받고 더욱 크게 성숙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는 은혜를 힘입게 되기 때문입니다(롬 5:3).

(3) 아름다운 소문이 나게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 8절에 보면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것이 없노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좋은 소문을 내는 교회입니다. 내용도 없으면서 겉으로만 퍼뜨리는 소문이 아니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겸전하여 내실 있고 튼튼한 교회로 소문이 났습니다. 또한 그들은 건강한 교회의 바탕 위에 아름다운 삶을 통하여 온 세상에 자랑스러운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고린도후서 2:15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죄악의 악취 속에 시달리며 피곤하고 곤비해진 세상을 향해 향기로운 그리스도의 소문을 퍼지게 하는 참 교회의 모습이 아쉽습니다. 이제 6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가 지난날의 아름다운 전통에 못지 않게 앞으로의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자리 매김 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