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무덤에서 살아나신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이라는 말은 어느 종교나 어떤 집단에서도 들을 수 없는 용어입니다. 이는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기독교만의 자랑이요 특징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하는 성경 계시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3-8).
바울의 경우 일찌기 그토록 핍박하고 거부했던 예수를 마음 속에 영접하고 오히려 그의 종이 되기까지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으로 평생을 살았고 또 이 도리를 증거하다가 고난을 받았으며 생명까지 내던졌습니다(행 23:6). 죽어도 살고 영원히 사는 부활의 신앙은 복음진리의 핵심이며 우리에게는 최고의 가치가 됩니다.
Ⅰ. 부활신앙의 개요
고린도전서 15장은 기독교의 부활신앙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기록한 논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일시적이거나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주권자 하나님의 오랜 경륜가운데 이루어진 사실임을 증거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탄생이나 고난의 죽음, 그리고 무덤에서 살아나신 부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성경 예언에 근거하고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고전 15:3-4).
(1) 구약의 예언과 암시적 사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실 것과 또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생명의 주님이 되시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중에 구약은 이를 예언하고 거기 대한 증표로 암시적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민수기 17:8에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 여행을 하던 중 각 지파의 두령의 이름을 쓴 지팡이 열두 개를 회막에 넣어두었는데 그중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살구 열매가 맺었습니다. 생명이 없는 마른 막대기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는 생명적 작용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7:1-10에는 에스겔이 본 마른 뼈의 환상이 있습니다. 골짜기를 가득 메운 마른 해골들이 하나님의 생기를 보내는 말씀의 대언으로 살아서 일어나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 계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을 예증하는 내용입니다.
(2) 예수님의 교훈과 행적
예수님께서는 평소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장차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일만에 살아나실 것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1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이 말씀을 잘 믿지 못했습니다(눅 24:25).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사건을 자신의 부활과 관련시켜 설명하기도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2:40에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실제로 살려내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막 5:41-42),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상여에서 일으켰으며(눅 7:14-15), 무덤 속의 나사로를 불러내었습니다(요 11:43-33). 이와 같은 사례들은 예수께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사실을 실증하는 내용입니다.
(3) 예수님 자신이 살아나신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에 의하면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몇 여인들이 예수께서 묻히신 무덤에 달려갔다가 무덤 입구에 막았던 돌이 굴러져 나간 것을 보았고 또 그 안에서 천사를 통하여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막 16:1-6). 지금도 예루살렘 인근에 있는 예수님의 빈 무덤은 생명의 주님 예수께서 부활하신 증거로 남아있어서 성경계시의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Ⅱ. 부활신앙의 신비
기독교의 부활신앙을 논증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성도의 부활과 직결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5-18에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다시 사신 것이나 마지막 날에 있을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그것은 부활자체가 신비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1) 순식간에 홀연히 살아납니다.
본문 말씀 51절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지막 나팔」이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그를 호위하는 천군과 천사장의 소리를 뜻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에는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리워지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심판을 받고 지옥 불에 던져진다고 하였습니다(계 20:6, 11-15).
(2)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살아납니다.
52-53절에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생명종교인 기독교만이 가지는 신비요 축복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변화되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반영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 50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혈과 육은 썩는 것이고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연인 그대로의 모습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요 3:6-7). 이와 같은 거듭남의 원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고후 5:17).
(3) 사망을 삼키는 비결이 있습니다.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망이 이김에게 삼킨바 된다는 표현은 부활신앙의 신비를 체험하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어느 누구도 사망을 이기거나 뛰어넘을 수단은 없습니다. 어떤 재주나 힘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국 최종적으로 사망의 권세 앞에서 다 굴복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사망의 권세마저 깨뜨려 버리는 신비로운 능력의 실제를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 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Ⅲ. 부활신앙의 능력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있는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였습니다(요 11:25-26).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시자 마르다는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하시고 나사로의 이름을 불러 일으켰습니다(요 11:39-40). 기독교의 부활신앙은 어떤 논리나 추상적 개념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삶과 직결되는 능력이요 신비입니다.
(1) 죽음을 향하여 호령하는 것입니다.
55-56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부활신앙의 능력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예외적 삶을 사는 자입니다. 예수 안에서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신앙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죽음을 향하여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하고 호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하신 말씀에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사망을 안겨 주는 원인은 죄에 있습니다(롬 5:12).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사죄의 은총을 받은 사람에게는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3:23-24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승리적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5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에 나간 군인들의 경우 아군의 장수가 적장의 목을 치고 나면 병사들은 이긴 전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우리 대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느 누구도 공략할 수 없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려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보장된 승리를 쟁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였습니다(요 16:33). 세상을 사는 성도가 수없이 많은 시험을 당하고 죽음의 세력에 둘러싸일 때가 있지만 그래도 인내하면서 담대하게 맞서 싸우며 승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비결을 승리자 예수로부터 공급되는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37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38-39절에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3) 소망 중에 충성하게 됩니다.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신앙에 투철한 사람은 영원하고 확실한 소망을 붙들고 사는 자입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경우 죽음으로 인생의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지 못하고 항상 좌절하며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19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하였습니다. 20절에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하였습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고난 중에서도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사역을 하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핍박과 환난을 당했지만 언제나 이를 극복하고 승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럴수록 자기의 몸을 던지며 헌신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봉사와 헌신이 영광스러운 축복의 결과로 이어지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해와 달과 별과 같은 영광으로 나타날 것을 소망하였기 때문입니다(고전 1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