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의 모든 성경은 거기 기록된 시대나 인물이나 사건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습니다(요 5:39).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영접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오늘 읽은 룻기의 내용도 이와 같은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냥 볼 때는 몰락한 나오미의 가정 이야기이거나, 시어머니와 자부 사이의 사랑스럽고 인간미 넘치는 미담을 소개한 것 같으나 사실은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흉년을 피해서 모압으로 이사갔던 엘리멜렉의 가정이 몰락하고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되돌아온 것은 낭패를 당한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장면을 소개한 것입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으로 돌아 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보아스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본문 말씀 1절에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력한 자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몰락한 나오미의 가정이 보아스로 말미암아 회복된 것처럼 죄로 인하여 멸망 받을 인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죄 받고 구원 받게 되는 진리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Ⅰ. 베들레헴에 있는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 4절에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베들레헴 사람이요 또한 다른 사람에게 복을 빌어 주는 사람입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의 탄생지이며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이 축복의 근원자 이십니다.
(1) 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은 「떡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육신을 건강하게 하는 양식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동시에 영혼의 양식을 의미하는 신령한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광야여행을 하는 동안 하늘의 양식 만나를 먹었으나 그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서 이 떡을 먹는 자는 죽지 않고 영생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6:51에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성찬예식을 거행하여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감나게 기념하고 있습니다(마 26:26).
(2) 성약(聖約)의 구주 예수님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베들레헴으로 보내시고 이새의 막내 아들인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붓게 하였습니다(삼상 16:1-13).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하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행 13:22). 이 말씀은 다윗을 이스라엘 열왕의 조상으로 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자손에게서 인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이 나게 하시겠다는 뜻이 있습니다(마 1:1).
(3)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
성경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하였고 또 한편으로 ‘다윗의 뿌리’라고도 하였습니다(계 5:5). 마태복음 1:1-18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는 다윗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열왕의 족보인 동시에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다윗과 그 후손들은 세상에서 제한된 시간 동안 왕위에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왕이며 만왕의 왕이십니다(히 7:3, 계 19:16). 일찌기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의 치리자가 나게 될 것이라고 한 선지자 미가의 예언은(미 5:2)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과 그의 왕권을 계시하여 준 것입니다.
Ⅱ. 밭이 있는 사람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룻은 시어머니에게 허락을 받고 이삭을 줍기 위해 밭으로 나갔습니다. 본문 말씀 3절에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고 하였습니다. 곧 룻이 이삭을 줍는 밭의 주인은 보아스였습니다. 가난하고 비천한 여인 룻이 찾아간 보아스의 밭은 오늘날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인간에게 희망을 주게 되는 주님의 교회를 뜻하는 것입니다.
(1) 양식이 있는 밭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할 때 밭에다 일정한 부분의 곡식을 남겨두었습니다. 레위기 19:9-10에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보아스의 밭에는 주인 되는 보아스가 룻을 위하여 특별히 배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룻기 2:15에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라고 하였습니다. 16절에는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17절에는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가운데서 주님의 밭인 교회는 신령한 양식이 있는 곳입니다. 요한복음 6:35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건전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영혼의 양식을 공급합니다. 시편 119:103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도 가려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대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하고 대답하였습니다(요 6:68).
(2) 교제가 이루어지는 밭입니다.
이삭을 줍기 위하여 보아스의 밭에 이른 룻은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과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보아스의 배려로 그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격이 없이 대화하며 교제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룻기 2:8에 보면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또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실찌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보아스는 룻이 모압에 있을 때부터 엘리멜레과 나오미의 식구들을 잘 봉양하였고 지금도 홀로 된 시어머니에게 효도를 하는 것을 기억하고 칭찬해 주었습니다(2:10-12).
이와 같은 보아스의 호의에 룻은 감격하여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2:13). 2:14에 보면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고 하였습니다. 보아스의 밭에는 주인과 종,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도 구별 없이 교제하며 한 식탁에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랑스러운 주님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공동체입니다.
(3) 꿈이 이루어지게 하는 밭입니다.
룻기 3:1에 보면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은 홀로 된 룻에게 결혼을 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하라는 희망적인 주문입니다. 룻은 나오미의 지시대로 목욕을 하고 몸에 기름을 바르고 새 옷을 갈아입고 보아스의 침소로 나아갔습니다(룻 3:3-5). 이리하여 보아스의 밭 노적가리 밑에서 보아스와 룻의 개인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고 보아스는 룻의 청혼을 받아 드려 새로운 희망을 싹트게 하였습니다.
룻기 3:10-11에 보면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고 하였습니다.
Ⅲ. 회복하는 사람입니다.
「보아스」라는 이름은 ‘유력한 자’, 또는 ‘힘이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단순히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만으로 룻을 사랑하고 그와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따르는 율법적인 모든 책임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몰락한 가정을 위하여 가까운 친족이 기업을 무르도록 정하고 있습니다(레 25:25). 룻기 2:20에 보면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고 하였습니다. 3:13에 보아스가 룻에게 약속하기를 “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보아스는 법적으로도 나오미와 룻의 문제를 맡아서 처리할 의무가 있는 동시에 그것을 감당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1) 좌절하는 인간을 회복시켰습니다.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에 온 룻은 인간적으로 볼 때 아무런 희망이 없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결혼을 하자 마자 남편이 죽었고, 홀로된 시어머니를 따라 나서기는 했지만 그 당시의 풍속으로 그 집안에 자기의 남편이 될 만한 남자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이방인을 개처럼 멸시하며 민족차별이 극심한 유대 사회에서 모압 여인인 그가 어떻게 살아나갈지 막막한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삭을 줍기 위해 우연히 찾아간 밭에서 유력한 자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보자 마자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고 하였습니다(룻 2:11). 그리고 그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한 룻에게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고 하며 (룻 3:10) 쾌히 허락하였습니다. 이는 멸망 받을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최상의 행복을 누리게 되는 원리를 말해주는 것입니다(고후 11:2).
(2) 몰락한 가정을 회복시켰습니다.
고대 히브리인의 가족제도는 결혼을 한 남자가 자식이 없이 죽게 되면 그 형제나 가까운 친척이 혼자된 여인과 결혼하여 가문의 대를 잇게 하였습니다. 신명기 25:5에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율법의 원리에 따라 엘리멜렉의 근족인 보아스는 룻을 자기의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그 집의 잃어버린 재산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무너진 가문의 대를 잇게 하였습니다(룻 4:9-10). 이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일로써 하나님의 섭리에 따르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3) 멸망 받을 인류를 회복시켰습니다.
회복하는 자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는 사랑과 긍휼을 가지고 좌절하는 여인 룻을 회복시켰고 넉넉한 재력으로 엘리멜렉의 무너진 가문을 회복시켰습니다. 이는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인류를 회복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속사(救贖史)적 관점에서 성경을 조명할 때 보아스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마 1:1)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역사경영에 그 가교(架橋)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룻기서의 클리막스는 “베레스의 세계”를 알려주는 것으로써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룻 4:1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