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온은 불과 삼백 명의 소수 부대를 가지고 메뚜기떼 같은 중다한 미디안 대군을 무찌른 용사입니다.
기드온의 군대가 항아리를 깨뜨리고 나팔소리와 함께 횃불을 치켜들었을 때 미디안 진영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지면서 동무끼리 칼로 치며 자멸해 버렸습니다(삿 7:22). 기드온은 에브라임 사람을 동원하여 패주하는 적장 오렙과 스웹을 잡아죽이게 하고 그 여세를 몰아 자신은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였습니다. 이때 기드온을 따르는 삼백 명의 군사들은 매우 지쳐 있었습니다.
본문 말씀 4절에 “기드온과 그 좇은 자 삼백 명이 요단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따르며”라고 하였습니다.
지휘관인 기드온은 처음부터 자기와 더불어 목숨을 건 전투에 참여했던 그 삼백 명이 지쳐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행보를 재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드온은 지금 미디안의 왕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면서 힘겹게 따라오는 자기의 부하들을 생각하여 숙곳 사람들에게 “나의 종자가 피곤하여 하니 청컨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고 부탁하였습니다(5절).
옛날이나 오늘이나 말없이 주님의 사역에 충성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되어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피곤할지라도 주 예수께 받은 사명 때문에 십자가의 그 길을 끝까지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Ⅰ.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목적을 수행하여야 하지만 선뜻 그 일에 자원하고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처음 기드온과 함께 미디안 전투에 동참하려고 했던 사람은 상당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쟁에 끝까지 참여한 사람은 삼백 명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말보다 행동이어야 하고 거기 따르는 결과가 있어야 됩니다(고전 4:20).
(1) 목적 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민수기 11:4에 보면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와 함께 출애굽한 무리들 중에 가나안에 대한 목적이나 기대가 없이 덩달아 따라 나온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애굽으로 되돌아가자고 하며 백성들을 선동하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목적의식이 없으면서도 섞여 있는 무리들은 주님과 함께 하는 십자가의 길에 동지가 되지 못합니다.
(2) 희생하기를 겁내는 비겁한 자들입니다.
처음 미디안 전쟁에 참여키로 한 의용군의 수가 삼만이 넘었습니다. 그 중에 절대다수가 전쟁도 치르기 전에 두려움이 앞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목적에는 동조하고 따라 나섰지만 자기를 희생하여야 하는 일에는 용기가 없었던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6:24). 교회 안에는 천당을 노래하면서 십자가와 고난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Ⅱ. 다른 목적을 가지고 따르는 자가 있습니다.
전쟁에 있어서 가장 위험을 가져오게 하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좋은 뜻으로 동참하는 것 같으나 결정적인 때에 아군의 진영을 교란시키거나 무너뜨리려는 세력입니다. 예수님의 천국비유 가운데 좋은 씨를 뿌려 놓은 밭에다 가라지를 덧뿌리고 가는 자들입니다(마 13:25).
(1) 상황을 엿보는 기회주의자입니다.
사사기 7:22-23에 보면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에서부터 모여서 미디안 사람을 쫓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기드온과 삼백 명이 밤을 새워 적군과 싸우던 현장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디안 진영이 무너지고 겨우 목숨만 남아서 도망가는 패잔병의 뒤를 쫓아 마침내 저희가 전쟁을 끝낸 것처럼 생색을 내었습니다. 어느 때나 명분보다 실리를 챙기려하고 희생보다 영광을 차지하려는 기회주의자가 있습니다. 목숨을 건 전투에는 외면하고 있다가 승전하는 막차에 올라타고 전리품을 가져가려는 사람들입니다.
(2) 자기의 이름을 내려는 공명주의 자입니다.
미디안의 방백들을 죽인 에브라임 사람들입니다. 사사기 7:24이하에 보면 기드온은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사자를 보냈습니다. 기드온이 그의 부하들을 데리고 미디안의 두목 오렙과 스엡을 쫓아가고 있었으나, 자기의 군사들이 너무나 지쳐 있었기 때문에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그들이 도망가는 요단 나루를 차단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의 말대로 길목을 지키고 있던 에브라임 사람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의 목을 치고는 자기들의 이름을 들어내며 힘을 과시하였습니다. 기드온과 그의 군사들은 죽을 고생을 다하고도 모든 영광을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말았습니다.
(3) 기분이 거슬리면 시비를 거는 자들입니다.
기드온의 분부대로 요단강 나루를 지키던 에브라임 사람들은 손쉽게 적장 오렙과 스엡을 죽이고 명성을 떨치게 되자 이제는 기드온을 향해 시비를 걸었습니다. 사사기 8:1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전쟁에 위험이 따르고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없을 때 뒤로 빠져 있다가 다 이겨놓은 전투에 참여하고 명성을 얻은 다음 엉뚱하게 시비를 걸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 나의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삿 8:2-3)고 하며 겸손하게 그들의 자존심을 높여 주었습니다. 따지고 시비를 가리자면 할 말이 많았겠지만 그냥 못 이겨 주면서 그들을 달랬습니다. 그야말로 지고도 이기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Ⅲ. 피곤하나 따르는 자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기드온과 함께 했던 삼백 명 용사들입니다. 그들은 목표가 분명한 사람들로서 기드온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피곤하고 지쳐있어도 끝까지 자기들의 소임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1) 피곤하게 만든 상황
성경은 인간을 매우 연약한 존재로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질그릇이라 했고(고후 4:7), 야고보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로 표현했으며(약 4:14), 구약의 이사야는 코에 호흡이 그치면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사 2:22). 따라서 사람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곤을 느끼게 되고 지쳐서 쓰러지는 무력한 존재인 것입니다. 기드온과 그의 군대를 피곤하게 만든 것은 몇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① 수적인 열세 때문입니다.
미디안 군대는 메뚜기 떼처럼 중다하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았습니다(삿 7:12). 거기 비하면 기드온의 군대는 월등하게 적은 수였는데 그나마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가 버리고 겨우 삼백 명의 소수만 남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일에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매우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멸망으로 가는 길에는 찾는 사람이 많으나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여 가는 사람이 적다고 하였습니다(마 7:13-14).
②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의 무리들이 나팔 소리와 함께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높이 들었을 때 미디안 군대가 다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패주 하는 오렙과 스엡을 추격하며 잡아야 되었고, 그 뒤에는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까지 완전히 섬멸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도 일조일석에 끝나지 않습니다. 산 넘어 산이라는 말과 같이 끝없는 전투를 계속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빌 3:12).
③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 5절에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종자가 피곤하여 하니 청컨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따르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숙곳 방백들은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어찌 네 손에 있관대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하고 조롱하였습니다(6절). 숙곳 사람에게 면박을 당한 기드온이 브누엘 사람들에게도 같은 부탁을 하였는데 그들에게서도 보기 좋게 거절당했습니다. 기드온도 사람인데 그의 자존심이나 개성대로라면 당장 그들과 맞붙어 싸우든지 결판을 내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2) 그래도 끝까지 따랐습니다.
저희 지휘관인 기드온이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이어서 숙곳 사람과 브누엘 사람들에게서 거듭 수모를 당하는 광경을 보고도 그 삼백 명 용사들은 끝까지 그를 따랐습니다.
① 하나님의 부르신 소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드온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름에 응하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들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으나 기드온과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끝까지 참고 따랐던 그들은 오래도록 기드온과 함께 무용담의 주역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32).
② 자기가 수행해야 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다가도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하거나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봉착하게 되면 그냥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 받은 사명의 확신이 없으면 돌아서고 맙니다. 바울은 오랫동안 옥고를 치르는 중에 그와 함께 길을 가던 동지들이 하나 둘씩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디모데후서 4:10-11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행 20:24).
③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곤하나 따르는 자들에게 승리의 영광이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으며 싸늘한 눈초리를 의식하면서도 끝까지 따를 수 있었던 것은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치켜들면서 적진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체험하였습니다. 저들은 피곤하고 지쳐 있으면서도 대장 되는 기드온의 지시대로 끝까지 적장을 추격했고 마침내 세바와 살문나의 목을 잘랐습니다. 그토록 오만했던 숙곳 사람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승리입니다. 어느 때나 그리스도인의 가는 길에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피곤하게 하는 요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의 척도를 가지고 보는 사람에게는 이 길이 너무나 확신이 있고 소망에 넘치는 승리의 길이요 축복의 길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승리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성령께서 함께 계시며 새 힘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사 40:2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