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설교

장년
예람지기 2004.12.19 00:00:00
773
  • 일자
    2004-12-19
  • 설교
    손상률 목사
  • 성경
    이사야 9:1~7
 
세계인의 명절인 성탄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 생명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은 모든 인류에게 가장 크고 유일한 소망이 됩니다.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불우한 사람이 있고 전쟁과 테러의 공포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불안의 요소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온 누리에 깃드는 축복의 성탄절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구약시대 메시야 선지자로 불리우던 이사야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예수 탄생의 원천적인 배경을 소개하면서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다”고 하였습니다(6절). 이 말씀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 아니고 한 아기가 우리에게로 오셨다는 것과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 아기를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절의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헤아리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은혜」또는 「선물」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 뜻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 없이, 조건 없이, 거저 주는 호의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가 지으신 자연과 만물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창 1:28). 그 중에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은 비길 수 없이 큰 선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1) 사랑의 선물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사람들은 고아원, 양로원 같은 불우시설을 찾아다니며 선물을 주곤 합니다. 병환 자들, 지체부자유자, 또는 소년소녀 가장 등 평소 이웃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써주는 계기가 됩니다. 이런 일을 어떤 목적이 있어서 하거나 형식적인 겉치레로 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따뜻한 인간성과 보이지 아니하는 사랑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어떤 조건이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인간 사회에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이런 경우를 엿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무엇이나 주고 또 주지만 거기에는 어떤 조건도 대가도 전제되지 않습니다. 오직 거짓 없는 사랑이 작용할 뿐입니다(롬 12:9).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 되는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선물로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1서 4:10에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2)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선물을 주고받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선물의 값이나 모양 또는 실용성에다 비중을 둡니다. 선물은 주고받는 사람의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값으로 따지면 얼마 안되더라도 주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거기에 담은 비중이 더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둘도 없이 고귀한 선물입니다. 빌립보서 2:6에 그는 본래 하나님과 본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분신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롬 8:32).
 
(3) 최상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가장 귀한 선물로 주셨지만 받는 우리의 입장에서도 이보다 더 좋을 것이 없는 최상의 선물입니다. 병원에서 생명이 경각에 처하여 당장 피를 수혈 받아야 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골수나 장기를 제공받아 이식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환자가 있다고 합시다. 거기에 어떤 사람이 값비싼 보석이나 아니면 진귀한 예술품을 선물로 가져다 준다해도 반가울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 또는 권력이나 명예를 준다해도 그런 것에 아무런 매력을 갖지 못합니다. 다만 생명을 회복 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최상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1서 4:9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롬 3:23-24).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걋?가치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찬송가 102장을 작곡하여 부른 죠지 베버리 쉬(G. B. Shea)는 세상의 부귀와 명예나 행복을 다 준다해도 주  예수와 바꿀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Ⅱ. 기묘자(奇妙者) 입니다.
 
본문 말씀 6절에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사용된 수식어들은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의 사역과 메시야적 기능을 묘사한 표현들입니다. 특히 그 이름을 기묘자라고 한 것은 불가사의한 기적의 실체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의 생애를 통하여 나타나는 사적들은 인간의 상식이나 과학적인 지식으로 설명이 불가한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요소임을 뜻합니다.
  
(1)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7:14에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예언한 것으로서 그 자체가 기묘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기 「임마누엘」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도 예수님의 신비성을 의미하는 이름입니다.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낼 때 말씀(λογο?)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요 1:1). 그런데 이 말씀이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뜻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요 또 완전하신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의 초자연적인 성품, 곧 전지성(요 1:48, 마 21:2), 전능성(마 14:25), 편재성(요 20:19) 등은 그가 하나님이시요 신성의 소유자이심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무엇보다도 무덤에서 부활하신 일과 하늘로 올라가신 사건도 우주적인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신 것입니다(마 28:18). 한편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신 인간으로서 배고프고(마 21:8), 목마르고(요 19:28), 고민하시고 (마 26:38), 눈물을 흘리신 것(요 11:35) 등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인 정서를 표현한 것입니다.
 
(2) 모사(謀士)입니다.

모사는 지혜로움을 뜻합니다. 이사야 28:29에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32:19에 “주는 모략에 크시며 행사에 능하시며 인류의 모든 길에 주목하시며 그 길과 그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시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롬 11:33).
예수님의 행적을 소개한 복음서 기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지혜로움을 나타내며 증거하였습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열두 살 소년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이 많은 율법학자들과 더불어 질문과 대답하신 장면을 소개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46-47에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산상보훈 강론이 끝난 다음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하였습니다(마 7:28-29). 마태복음 13:54에도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하고 의아해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지신 지혜는 창조주의 지혜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에 인간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기묘요 신비입니다.
 
(3) 영존 하는 왕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마태복음 2:1-2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나타난 별을 보고 그 주인공을 찾아서 예루살렘까지 왔던 사람들인데 그들이 헤롯왕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가서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는데(마 2:11), 그런 것은 왕이나 황제에게 바치는 최상의 물품입니다. 계시록 19:16에는 예수님을 가리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7절에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위”란 이스라엘의 왕통을 말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내역을 설명할 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하고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다윗의 후손 이스라엘 왕들의 이름이 열거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세상의 왕들은 역사의 시작과 끝이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왕입니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가 되기 때문입니다(히 13:8, 계 21:6).
 

Ⅲ. 복음입니다.
 
예수께서 탄생하던 그 시간 크리스마스 새벽 송을 하기 위해 베들레헴 목장에 나타난 천사의 무리들은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하였습니다(눅 2:10-11).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소식은 확실히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요 복음입니다.
 
(1) 흑암의 빛입니다.

본문 말씀 1절에 “전에 고통 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2절에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흑암」이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을 뜻하는데 이는 죄와 죽음을 상징합니다. 한편 빛은 의와 진리와 생명에 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9에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 빛을 생명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4).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여기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고 하였으니 이는 죄와 죽음아래 놓였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기서 해방되고 참생명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하였습니다(롬 8:1-2).
 
(2) 속박 당한 자에게 자유입니다.

본문 말씀 4절에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도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특징지어 하신 말씀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유형무형의 얽매임에서 고통 당하는 자들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스스로 거기서 벗어날 힘이 없습니다. 오히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하고 탄식을 할 뿐입니다(롬 7:24).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하시고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마 9:12-13). 당시에 얽매인 자는 종이나 노예를 연상하게 합니다. 종은 자유도 권리도 없고 언제나 죽음의 현장에서 몸부림치며 탄식하기만 합니다. 이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마 11:28). 누가복음 4:18-19에 보면 예수께서 안식일에 갈릴리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3)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천군들이 크리스마스 새벽 송을 하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창이나 칼에 의한 무력으로 통치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과 평화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세상의 임금들은 제각기 전쟁을 위한 군비를 확장하고 그것으로 힘을 과시하려 애를 씁니다. 시편 2:1-4에 보면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고하였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무력을 비웃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고 하여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이상적인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였습니다(사 2:4).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시고 영원토록 그것을 보존하시게 됩니다. 지금 세계의 모든 인류는 하나같이 평화를 소망합니다. 그 영원한 평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사야 11:6-9에 보면 완성된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계에까지 약육강식(弱肉强食)이 없어지고 에덴 동산처럼 완전한 평화가 정착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케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