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불리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확실히 문제의 민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적으로 보거나 세상적으로 보아도 항상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고 격동기마다 거센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지정학적으로 삼대륙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서 열강이 대결할 때마다 그들은 제일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한이 많은 민족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세계 어느 곳에서도 미움 받지 않는 곳이 없으며 지금도 인류를 긴장시키는 전쟁이나 테러에 이스라엘이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히브리 민족이 사멸되지 않고 건재한다는 사실이 특이합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뿌리깊은 역사가 있고 고유한 언어와 문화가 있으며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하는 종교와 율법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악조건에도 이를 극복하고 이겨낸 관록과 투철한 민족정신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히브리민족이 가지는 근원적인 특징이 아닙니다. 오직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통하여 그 민족이 존재하는 이유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구속역사의 중심에 이스라엘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오랜 세월 그 어려운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살아남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하였습니다(사 6:13). 하나님께서는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송두리째 다 잘려 나갔더라도 그루터기를 땅속에 남겨 두셨고 결국 그 뿌리에서 새로운 싹을 틔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한 씨를 터뜨리게 될 이 땅의 그루터기는 두말할 것 없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게 될 메시야 시대의 비젼입니다. 또한 이것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석권하게 될 신약교회의 환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건전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하여 이 땅에 그루터기의 역할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Ⅰ. 진리의 그루터기입니다.
그루터기는 나무의 밑둥치요 뿌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진리에 기초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집으로 비유하고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 3:15).
(1) 말씀에 뿌리박은 신앙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선민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신 6:6-9).
신약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 1:12-13). 이들의 믿음은 하나처럼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20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는 신약과 구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에 뿌리를 내린 믿음은 시대나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굳건하게 지켜지는 것입니다.
(2) 환난을 통과한 신앙입니다.
본문 말씀 13절에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라는 말과 “그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백성이 극심한 환난을 당하여 나무의 가지와 둥치가 찍혀나가는 것 같은 수난을 뜻합니다. 그중에 십분의 일이 남았다는 것은 이 환난과 역경에서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거나 변절하더라도 소수의 사람이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에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고 하였습니다. 환난이 지나가고 모든 것이 황폐화된 뒤에도 남아 있는 자는 소수일 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많은 아픔과 상처를 지니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든든한 믿음의 뿌리를 지니고 있는 자들입니다.
(3) 구원의 근거가 되는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32).
어느 때나 하나님의 나라는 많은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기초한 바른 믿음이 좌우합니다. 예수께서 보리떡과 물고기로 이적을 행하실 때 그 많은 무리들이 배불리 먹고 즐겼으나 결국 제자들만 남겨 놓고 모두 다 물러가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는데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하고 대답하였습니다(요 6:68). 로마서 9:27에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Ⅱ. 전통의 그루터기입니다.
역사가 오래된 민족일수록 뿌리깊은 전통이 있고 고유한 문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하나님 중심의 생활과 전통이 있습니다. 그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나쁜 폐습으로 변질되기도 하지만(마 15:3), 신앙적인 문화와 전통은 잘 지켜져야 되고 더욱 발전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과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마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둥치 채 베임을 당하는 것처럼 기존 전통과 가치관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 같은 징후를 보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소수일지라도 남아서 지켜야 될 뿌리깊은 전통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문화적 전통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문화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을 유일신으로 하고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선민사상의 뿌리가 된 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모세의 율법이 선민의 생활에 있어서 세미한 부분까지 엄격하게 적용되는 규범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에게 분향하거나 이방인들이 즐기는 우상문화에 접하는 것은 가장 큰 죄악으로 여겼습니다. 음식문화에 있어서도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구별하였습니다. 레위기 11장에 각종 동물 가운데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은 먹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 사는 증거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0:14에 베드로는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반드시 회당중심의 문화를 지킵니다. 거기서 랍비가 율법을 가르치고 선민생활의 문화와 전통을 익히게 하였습니다.
(2) 윤리적 전통입니다.
성경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서로 간에 지켜야되는 윤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의 경우 가장 가까운 가족관계에서부터 예절과 도덕을 준수하게 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는 극진한 효도를 요구하고 있으며(출 20:12), 부부간에는 인격적으로 서로 존중하되 정절과 신의를 지키게 합니다(잠 6:32-35). 그 중에도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며 복종하는 것과 아내는 남편을 받들며 순종하는 자세로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게 하였습니다(엡 5:22-33).
구약시대에는 가부장적인 대가족 제도 가운데서 어느 가족이 몰락할 경우 가장 가까운 편에서 재산을 물어주고 무너진 가계를 일으키게 하는 「고엘」(????)제도 같은 것은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가정을 지키게 하는 아름다운 윤리적 전통입니다(룻 4:9-12).
어느 사회에서나 젊은이들은 노인을 우대하고 제자들은 선생님을 존경하는 사회윤리도 확립되어져 있습니다.
(3) 경건생활의 전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경건한 생활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되는 증거요 자존심이었습니다. 족장 때부터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고 어떤 경우에도 예배 중심의 삶을 펼쳐나갔습니다. 포로시대 이후 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마음은 성전을 행하였고, 주의 전을 사모하는 나머지 영혼이 쇠약해지는 것 같은 애절함을 노래하였습니다(시 84:1-7).
성전을 사모하는 그들의 마음은 단순한 건물이나 공간을 잃은 것에 연연함보다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삶의 구심점을 잃었다는 탄식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다니엘은 유배지 바벨론에서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며(단 6:10), 그의 친구들은 왕궁에서 주는 불결한 음식을 거부하고 채소를 먹으면서 자기들의 거룩을 지키려 하였습니다(단 1:8).
우리 한국교회에도 아름다운 전통의 뿌리가 있습니다.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삶의 원리를 좇아 하나님 제일 주의의 신앙과 교회 안에서 지켜지는 예절과 경건한 생활의 뿌리깊은 전통이 있습니다.
Ⅲ. 소망의 그루터기입니다.
욥기 14:7-9에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찌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찌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고 그 남은 뿌리가 땅속에 묻혀 있어도 거기서 새로운 줄기를 내어 거룩한 씨를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야말로 인류에게 주는 가장 큰 소망이 됩니다.
(1) 메시야의 소망입니다.
본문 성경을 기록한 이사야는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초점을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시게되는 사건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며 최대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사 9:6). 그분이 육신을 입기 위하여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실 것과(사 7;14),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사 55:3).
그 당시로 보아서는 범죄한 인간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고 그 징벌이 무거워서 마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한 것 같은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은 그 남겨진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11:10에 보면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 기적 같은 일입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신비요 이적입니다. 이사야 9:7에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하였습니다.
(2) 성도에게 주는 축복의 약속입니다.
다니엘 4:14-15에 보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왕위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께서 보여준 이상이 있습니다. 곧 거대한 나무를 베고 그 뿌리는 남겨두었다가 칠 년 후 다시 싹이 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교만한 느부갓네살이 짐승처럼 들판을 헤매며 칠 년을 지난 후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다음 제정신이 돌아와서 왕위에 복귀하였습니다.
나무가 베임을 당하고 그 남은 뿌리에서 새싹이 나게 되는 것은 징벌과 고난의 세월을 통과한 다음 다시금 회복되게 하시는 축복의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이 약속대로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주셨고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대로 복을 주었습니다.
마태복음 1:1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하고 그들이 받는 메시야적 축복의 뿌리를 나타내었습니다. 인류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과 다윗을 뿌리로 하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은 모두 그 후손이 받을 축복의 뿌리입니다(창 12:2-3, 미 5:2). 조상의 신앙과 헌신은 훗날 그 자손이 받게되는 축복의 근거가 됩니다.
(3) 그리스도 교회의 비젼입니다.
구약 성경이 제시하는 메시야 운동의 비젼은 결국 신약의 교회운동을 통하여 활발하게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완전히 잘려져 나가고 그 밑둥치만 없는 듯이 땅속에 남아 있어도 거기서 새싹이 나고 큰 줄기로 자라게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비유 중에서 그가 전개하는 교회운동을 겨자씨로 비유하였습니다(마 13:31-32). 지극히 작은 것이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며 그 가지를 마음껏 뻗어나가는 특징을 말했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행 4:9-12).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일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신 예수님, 그분이 죽은 자를 살리셨고 장차 재림하셔서 모든 잠자는 자를 부활하게 하실 분입니다(살전 4:16-17). 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에게 유일한 소망이며 가장 큰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