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식의 틀
어느 날 집사님 한 분이 그림 작품을 완성했다고 집사님의 작업실로 저를 불렀습니다. 며칠 밤을 새워가면서 그린 그림이라고 자랑을 하십니다. 그림에 대해 문외한인 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래서 설명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러자 설명을 정중히 거절하시면서 그림은 느끼는 것이라고 한번 느껴보라고 설명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저히 저의 능력으로는 이해를 할 수 없기에 간곡히 부탁을 드려서 제목과 간단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 그림의 제목과 설명을 듣고서야 겨우 그 그림을 보는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보는 인식의 틀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실 그림을 감상하려면 제목이나 설명을 의지하지 말고 그 집사님의 말대로 느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래야 다른 것에 선입견을 갖지 않고 올바른 판단으로 그림을 감상할 수 있으니까요. 이 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그림을 보냐는 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틀에 따라서 우리는 사물과 사건을 다르게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인식의 틀을 갖느냐에 따라서 우리에게 들려지는 사물과 소리는 다르게 보여지고 들려집니다.
제가 3년 전에 우즈벡을 다녀왔을 때의 일입니다. 대학생들과 선교여행을 마치고 귀국하기 위해서 우즈벡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옆에 40대의 한국인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먼 이국 땅에서 보는 한국인이라서 말을 걸었습니다. 그분이 여기 오신 목적은 사업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슨 사업인지 가만히 들어보니까 곰의 웅담이나 모피를 싼값에 구입해서 한국에서 비싼 값에 판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에게 무엇을 사가지고 가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모피는 어디서 사면 가장 싸다는 귀한 정보도 주셨습니다.
저와 그 분은 동일하게 우즈벡이라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서로 본 것은 달랐습니다. 사업가의 눈으로 보면 웅담하나만 사가지고 가면 항공권 값이 나오는 돈벌이의 땅이었지만, 제 눈에는 복음의 문이 열리고 있는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틀이 다르다보니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장소를 보면서도 서로 다른 부분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제가 들었던 우즈베키스탄이라는 나라의 소식은 복음의 불모지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야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짭짤한 생각에 빠져 있다가 저는 한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을 백 이십년 전에 정탐했던 초기의 선교사님들의 마음이 우리와 같았을까? 그들도 우리처럼 새로운 땅에 대한 소식을 자기 교회와 자기 나라에 전해서 복음을 뿌리고 싶었을까? 아마 우리와 같았을 것입니다. 언어와 나라는 달라도 마음만은 같았을 것입니다.
2. 모든 민족, 온 세상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간증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는 세 개입니다.
모든 민족, 온 세상, 전파
모든 민족! 이것은 이 세상의 많은 민족들을 이야기합니다. 일백 이십 여 년 전에는 우리 한국이 모든 민족에 포함되는 선교지였습니다. 오늘 제목이 '선교지 한국에서 선교 한국으로?입니다. 언뜻 보면 비슷한 말인것 같지만 선교지 한국과 선교 한국은 큰 차이를 품고 있습니다. 선교지 한국은 복음이 뿌려져야 하는 불모지를 말하지만 선교 한국은 복음이 흥왕하여져서 다른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3. 조선을 향한 인식의 틀
조선민족은 사천 년 동안 시간은 있었지만 역사는 없었습니다. 사람은 있었지만 삶이 없었던 민족이었습니다. 깊은 잠에 빠진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불리는 조선민족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 있었기에 이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1) 알려진 조선
복음의 불모지요 선교지였던 한국이 처음으로 서양에 알려지게 된 것은 중국과 일본에 와 계시던 선교사님들에 의해서입니다. 조지 낙스라는 일본에 계시던 선교사님이 본국의 파송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서양학문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 지난 번 두 조선 학생이 세례를 받았고 그밖에도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 내년 4월에는 선교사가 조선 땅에 상륙해야만 합니다. 이 선교지를 열기 위하여 우리 교회가 세 사람만 택하여 보낼 뜻은 없습니까? 만일 우리 교회에서 할 수 없다면 다른 교회에서라도 이 부름에 응답을 해야만 합니다. 그 자원자를 찾아 주십시오.?
이 때 세례 받은 두 학생이 바로 이수정과 김옥균입니다.
중국의 길버트 선교사님은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한성과 또 여러 항구에는 벌써 외국인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좋지 않은 행실을 하는 사람이 있어 서양문명이나 서양 사람들의 명예에 큰 손해를 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서 빨리 참신하고 헌신적이며 현명하게 움직이는 기독교 신자들의 참여로 제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장사꾼이 먼저 들어가고 전도가 그 뒤를 따라서야 되겠습니까? 전도를 계획한다면, 지금부터 곧 시작해야만 합니다. 확고한 방침을 가지고 또 하나님의 섭리대로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2) 토마스 선교사
1832년 귀출라프 선교사님이 한국을 방문한 이래, 그 다음은 한국의 최초의 순교자이신 토마스 선교사님이십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두 번이나 조선을 선교여행 하면서 서해안의 곳곳에 성경을 나누어주면서 복음을 전했던 토마스 선교사님은 이제는 본격적으로 조선을 선교할 계획을 세우고 조선으로 들어갈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을 향해 떠나면서 통역관으로 동행하자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조선의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대동강을 따라 올라가던 제너럴 셔면호는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서양의 이양선에 반감을 갖고 있던 조선에 의해서 대동강변에서 좌초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토마스 목사님은 기회가 되는 대로 많은 조선 사람들을 만나면서 성경을 나누어 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국 배가 불타면서 간신히 강으로 몸을 던져 대동강 강둑에 닿았지만 토마스 목사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조선 군사의 칼이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높이 쳐든 칼 앞에서 기도를 마친 토마스 목사님은 그 군인에게 마지막으로 성경을 전하면서 예수를 전하고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병사가 바로 박춘권입니다. 이후에 토마스 선교사가 준 성경책을 읽다가 감동을 받고 후에 평양의 장대현(널다리)교회의 최초 교인 중에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토마스 선교사가 던진 성경을 주워서 예수를 믿은 최치량은 후에 장대현(널다리) 교회를 세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사람이 조선에 대한 하나님의 인식의 틀을 갖게 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미국은 자국 배인 제너럴 셔면호의 행방을 찾다가 조선에서의 소식을 알게 되고, 결국에는 한미수호조약을 1882년에 맺게 됩니다. 이로 인해 미국의 각 교단에 조선의 소식이 전해지게 되고, 선교사의 파송이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3) 견미단
한미수호조약으로 인해 견미단이 조직되어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조선은 갓과 두루마기의 한복을 입었었습니다. 그런데 그 복장으로 미국의 기차를 탄 견미단. 생각만 해도 얼마나 우스운 모습이었겠습니까? 기차에 탄 모든 사람들이 웃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인식의 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단순히 웃으면서 보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어디 살까? 그 나라에는 복음이 들어갔을까? 선교사님이 들어가 계실까??
이것이 하나님의 인식의 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그 기차에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고우처 목사와 게일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이 둘은 견미단 일행을 보면서 그들 마음속에 있던 선교에 대한 생각이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 들어보고, 그 나라에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과 이제 문이 개방되어 미국을 왔다는 소식을 들은 고우처 목사는 자신의 유산을 털어 선교부에 조선을 위해 써달라고 기부를 했습니다. 선교부의 반응이 미온적이자 이번에는 일본에 있는 멕클레이 선교사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조선 선교를 부탁한다는 글을 썼습니다. 이에 멕클레이 선교사님은 이전에 세례 받았던 김옥균을 만나서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해도 좋다는 조정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선교사님들이 조선으로 헌신을 하고 들어오게 됩니다.
조선의 소식은 계속 미국의 곳곳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미션마인드가 있는 사람들은 재산을 기부하고 자신이 헌신을 하면서 조선에 선교사로 오게 됩니다. 조선 민족을 위해 기도와 선교헌금이 모아지면서 그 뒤를 헤론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 같은 귀한 분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됩니다.
(4) 알렌 선교사
이렇게 아직 조선의 쇄국정책이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사랑을 불태우며 복음을 전하신 선교사님들의 노력으로 드디어 조선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알렌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알렌은 이미 중국에 파송된 선교사님이십니다. 그러나 조선의 소식이 전해지자 바로 조선으로 들어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알렌은 의사의 직업을 갖고 있었기에 미국의 도움으로 주한 미군 공사관 공의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알렌이 원한 것은 공의가 아니라 왕실의 의사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습니다. 개화파의 사상을 가진 김옥균이 수구파에 대항하여 일어난 난입니다. 이때 민영익이 자객의 칼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한의사들이 와서 손을 써봐도 가망이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알렌이 도착해 보니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았습니다. 가망 없는 치료를 시도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치료를 하는 중에 다행히도 민영익이 소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알렌은 왕실의 의사가 되어 조정의 신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민영익은 감사의 답례로 알렌에게 십만 냥을 주었고, 이 돈으로 설립한 것이 광혜원입니다. 그 후에 제중원으로 개명을 했습니다. 이후에 미국의 사업가 세브란스가 기부한 돈으로 세브란스라는 병원으로 바뀌게 됩니다. 바로 알렌이 조정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후에 들어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쉽게 조선에 정착을 할 수 있었습니다.
(5) 언더우드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처음에는 인도를 위해 헌신한 분이었습니다. 벌써 인도어를 의사소통 할 수 있을 정도로 익힌 뒤였습니다. 이때 언더우드에게 조선의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천 삼 백만 민족이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 가난과 질병과 학대 속에서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드디어 작년에 문호를 열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조선 민족을 위해 선교사로 갈 것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 도전 앞에 큰 부담을 느낀 언더우드는 자신은 이미 인도에 헌신을 했고 언어도 많이 공부를 한 상태라서 친구들을 찾아다니면서 권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반응은 별로였습니다.
이로 인해 실망한 중에 마음속에 음성이 들려왔습니다.“왜 너는 못 가느냐?? 이것은 분명히 자신의 목소리는 아니었습니다. 왜 너는 못 가느냐? 그제서야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올바른 인식의 틀을 갖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인도를 위해 준비하던 것을 놓고 조선으로 떠나게 된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 앞바다에 발을 디딘 것입니다. 바로 이 날이 한국교회가 최초로 기독교 선교사를 우리나라에 들어온 날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 후 새문안 교회를 개척하였고 연희전문학교를 세워 교육사업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병원이 합쳐져서 오늘날의 연세대학교가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6) 아펜젤러 선교사
언더우드와 함께 들어온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 아침에 이렇게 기도를 했다고 일기에 적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부활의 권세와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이 민족에게 빛을 비취게 하소서?
아펜젤러는 조선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선교사님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집회를 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번은 목포에서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서 배가 파선되게 되었습니다. 이때 조선 소녀하나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즉시 물로 뛰어들어 소녀를 구하고 자신은 힘이 빠져 큰 파도에 휩쓸려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40세의 짧은 생이지만 조선을 향한 조선사랑은 누구보다 남달랐던 분이십니다. 그가 세운 교회가 바로 정동감리교회입니다.
아펜젤러는 순교를 하였지만 그의 사역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아펜젤러의 아들이었던 헨지다지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방황의 시간을 겪었지만 다시 조선의 선교사가 되어서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세운 배재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조선민족이 복음으로 살도록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가 병들어 미국으로 치료하러 갈 때도 유언 하기를 ‘내가 죽거든 절대로 미국에 묻지 말고 조선 땅에 묻어주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외국인 묘지인 양화진에 수많은 선교사들을 묻으면서 아버지의 무덤은 이곳에 없는 것이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직도 목포 앞바다에서 있을 아버지의 시신에 더욱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으면 꼭 한국 땅에 묻어줄 것을 유언한 것입니다. ‘나를 한국 땅에 묻어 주고,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조선 사람을 사랑하였는지, 조선 사람으로 알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그는 묻혀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아펜젤러 선교사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무덤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아펜젤러 가족의 숭고한 희생의 삶이 바로 우리 민족에게 큰 빛이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4. 우리의 인식의 틀.
이처럼 많은 선교사님들은 조선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이 주신 인식의 틀, 즉 선교마인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응답을 했습니다. 가는 선교사로의 응답과 보내는 선교사로의 응답이 한국을 지금과 같이 부흥하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진 빚을 갚아야 할 때입니다. 사랑의 빚!
우리가 동일하게 여행을 해도 보는 마음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우즈벡에서 만났던 그분도 저와 동일하게 우즈벡을 바라보았는데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기차 안에 탄 조선인의 우수꽝스러운 복장을 보고 웃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보면서 미션마인드를 품은 고우처 목사님과 게일이라는 청년은 달랐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선교지였던 조선을 선교국으로 바꾸셨습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들려오는 많은 선교사님들의 이야기 앞에 어떤 마음으로 듣고 계십니까? 저는 여러분이 다 선교지로 나가는 것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중에서 어떤 분은 선교지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모두가 보내는 선교사이고 나가는 선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많은 선교지의 소식 앞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올바른 하나님의 인식의 틀을 가져야 합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말씀은 단지 누가 해 놓은 것을 우리가 얻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증거되고 전파되는 자리에 우리 중에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누군가는 그것을 후원하고 보내는 선교사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곳이 어디이든지 우리는 함께 이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선교지 한국을 선교 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조선의 소식을 들은 많은 선교사님들이 미온적으로 반응을 했다면 오늘의 한국은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선교지 한국이었을 것입니다. 인도를 보십시오. 조선보다 백 여 년이나 먼저 복음이 들어갔지만 하나님의 온전한 인식의 틀이 없기에 그들은 여전히 선교지로 머물고 있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