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에서나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공식과 기준이 있습니다. 도량형(度量衡)이라고 하는 것은 크기나 무게나 내용물의 분량 등을 측정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그 중에도 무게의 경중을 가름하고자 할 때 저울을 사용하게됩니다. 저울 중에도 고철덩이와 같이 크고 무거운 것을 다루는 것이 있는가 하면 가볍고 세미한 것을 다루는 작은 것도 있습니다. 작고 세미한 것일수록 매우 정밀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저울이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감정하실 때도 저울을 사용합니다.
본문 성경에 나오는 벨사살이라는 인물은 바벨론 나라의 마지막 왕입니다. 그가 신하들과 함께 술을 먹으며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맞은편 벽에 글을 썼습니다. 마침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다니엘이 그 글씨를 읽고 왕에게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 글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는 뜻입니다(27절).
막강한 권세와 영화를 소유한 벨사살 왕도 하나님의 저울에 의하여 폐위를 당하고 그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던 바벨론 제국 역시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되어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의 공정한 저울추에 따라 개인과 역사를 감정(鑑定)하시는 것입니다.
Ⅰ. 믿음의 저울입니다.
성경은 세상 사람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구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을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2-13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1) 믿음이 없는 자를 가려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 가운데도 신자가 아니면서 겉으로만 신자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마치 밭에서 좋은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서 자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추수 때가 되면 주인은 추숫군을 시켜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고 하나는 자기 곡간에 다른 하나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진다고 하였습니다(마 13:25-30). 말라기 3:18에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을 섬겨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전도서 12:13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계시록 21:8에 보면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믿지 아니하는 자가 발을 들여놓지도 못하고 다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곳으로 소멸된다고 하였습니다.
(2) 믿음의 행실이 없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1:19에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마 7:16).
이와 같이 믿음도 행함의 열매를 맺어야됩니다. 성경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을 때 이를 영혼 없는 몸과 같이 실상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약 2:26). 입으로는 신앙고백을 하고도 행동으로 실천함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죽은 것이라고 진단합니다(계 3:1). 행실의 열매가 없는 믿음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져 마치 맛 잃은 소금처럼 밖에 내다 버리게 되고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되고 맙니다(마 5:13). 예수님께서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서 심판 날에 믿음의 실적이 없는 자를 구별해 내고 준엄한 형벌을 가한다고 하였습니다(마 25:31-46).
(3) 처음 믿음을 저버린 자입니다.
디모데전서 5:12에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연약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오는 유혹과 자기 속에 일어나는 정욕에 자주 흔들리곤 합니다. 확실하게 신앙고백을 했던 사람도 돌아서면 사단의 손에서 놀아나고 맙니다(마 16:22-23).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처음 믿음을 굳게 잡아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승리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1:19에 보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하늘의 영물들도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위치를 이탈하고 파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다서 1:6에는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세를 사는 성도들을 향하여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당부하였습니다(계 2:25).
Ⅱ. 인격의 저울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인격의 본질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창 1:26-27).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란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뜻하는 것으로서 이를 인격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갈 4:19).
그리스도의 인격은 겸손입니다(마 11:29). 빌립보서 2:6-7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인격을 저울에 달아 교만으로 기울어지면 가차없이 징벌하십니다. 말라기 4:1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중에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아들 벨사살 왕의 교만을 질타하였습니다. 20절에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라고 하였습니다. 22-23절에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라고 하였습니다.
(1) 자기를 높이는 자입니다.
다니엘은 벨사살 왕의 아비인 느부갓네살이 교만함으로 인하여 왕위에서 내쫓음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20절). 실제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교만이 극에 달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전쟁 군주로서 세계를 제패한 자기의 힘과 권력, 그리고 대제국 바벨론의 모든 영광을 과시하고자 만천하에 자기 이름을 나타내려 하였습니다.
다니엘 3장에 보면 그는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자기를 위하여 신상을 세웠습니다. 그 재료는 금을 썼고 크기는 높이가 육십 규빗, 넓이는 여섯 규빗이 되는 거대한 신상입니다. 그는 또 각도의 방백과 수령 그리고 모든 관원을 불러모으고 악기 소리에 맞추어서 그 신상에 절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신상에게 절하기를 거부하던 히브리 소년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풀무 불에 집어넣었습니다(단 3:23).
(2) 하나님의 권세에 승복하지 아니합니다.
다니엘 2장에는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 본 신상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은 은이며, 배와 넓적 다리는 놋이요 종아리는 철이며 발가락은 철과 진흙이 섞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벨론을 위시하여 세상을 지배하게 될 강대한 나라를 암시하는데 그 중에도 느부갓네살의 바벨론은 정금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난데없이 날아든 뜨인 돌이 그 신상을 쳤을 때 산산조각이 나서 타작마당의 겨와 같이 날아가고 신상을 친 돌만 태산처럼 커서 그 자리에 남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이 신상의 계시를 통하여 세상 나라와 왕권은 하나님의 권세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셨지만 그는 겸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다니엘 4:30-33에 보면 그가 지붕 위를 거닐면서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하였는데, 그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서 “느부갓네살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즉시 왕궁에서 쫓겨나 들판으로 돌아다니며 소처럼 풀을 뜯어먹고 살았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 정신이 돌아왔습니다(단 4:34-37).
(3)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자입니다.
느부갓네살의 아들인 벨사살은 그 아비보다 더 교만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그 영광을 짓밟았습니다. 그가 귀인들을 천명이나 초청하여 잔치를 배설하고는 옛날 그의 아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 온 각종 기구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금, 은 기명을 술잔으로 사용하면서 자기 나라의 온갖 우상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보이는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바로 그때 맞은편 벽에서 난데없는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쓰며 그의 멸망을 계시해 주었습니다. 다니엘의 말대로 벨사살은 죽임을 당했고 바벨론 나라도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다니엘 5:30-31에 “그날 밤에 갈대아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18:12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의 저울로 달아보시고 교만한 자를 가차없이 내어 치신다는 교훈을 일러줍니다.
Ⅲ. 사역의 저울입니다.
본문 말씀 28절에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 함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와 역사의 흥망을 주장하시는 분으로서 개인이나 국가가 그의 역할을 다하고 나면 물러나게 하거나 폐기처분 해버리고 새로운 시대와 인물을 들어 쓰십니다. 고대 문명의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던 바벨론 나라도 하나님께 밀려나고 이제는 지구상에 고적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1) 모든 피조물은 고유의 목적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 그 모두에게 각기 제 목적을 부여하였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쓰여지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자기 위치에서 자기 본분을 다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로 표현됩니다(창 1:31).
다윗은 만물이 제 기능을 잘하는 것을 보면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고 하였습니다(시 19:1). 한편 바울은 자연과 만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대로 그 역할을 못다 함에 대하여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롬 8:21).
(2) 악인의 악역도 필요합니다.
잠언 16:4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악인도 악한 역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들 중에는 선한 천사가 있고 악한 천사도 있습니다. 군인을 훈련시킬 때 가상적군을 내세워 실전을 방불케 하는 작전을 감행하게 하여 전력을 증강시키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앙의 훈련을 하는데는 악한 영들의 역할도 효과적으로 쓰이게 됩니다(욥 1:6-12).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언제나 그 주변 나라들과 이방 군주들과의 관련된 사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45:1에는 페르시아의 임금 고레스에 대하여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이방인이나 불신자라 하더라도 그의 역할이 하나님 보시기에 쓸모가 없을 때는 그 직을 빼앗기거나 버림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선한 목적에 쓰임을 받아야 됩니다.
사람이 누구의 손에 붙들려 어떤 목적으로 쓰이느냐에 따라서 의의 병기도 될 수 있고 불의의 병기도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13에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가 가진 지식과 재능과 물질과 모든 조건들을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는데 사용하여야 됩니다.
우리가 다 주님의 선한 목적을 위해 쓰임을 받게 되면 그 자체가 바로 최상의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적에 요긴하게 쓰이는 사람을 매우 무게 있게 여기시고 그를 붙들어 주십니다(행 13:22).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일백 이십 년에 걸쳐 그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평생을 회고하면서 스스로 행복자라고 간증하였습니다(신 3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