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설교

장년
예람지기 2004.03.07 00:00:00
1765
  • 일자
    2004-03-07
  • 설교
    손상률 목사
  • 성경
    누가복음 8:26~39
 

팔레스틴의 북쪽 육지 속에 있는 갈릴리 바다는 우리 예수님께서 행하신 복음사역의 거점이었습니다. 그 바다에서 조업하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그 바다 위에서 이적을 행하시며 여러 가지 천국 복음의 교훈을 주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와 그 주위에 있는 성읍과 촌락은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이 배여 있는 유서 깊은 지명들입니다. 예수님의 제 2고향이라 불리우는 가버나움을 비롯하여 벳세다, 디베랴, 팔복산 언덕 등 복음서에 등장하는 지명들 속에는 거라사인의 지방도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어느 곳에 가시든지 어떤 대상을 앞에 놓고라도 그가 의도하시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거라사인의 땅에서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특이한 상황이 전개되는 또 하나의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무덤 사이로 배회하던 귀신들린 자를 만난 것입니다. 그 귀신 들린 사나이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먼저 소리를 지르며 대어들었습니다. 28절에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군대」라 불릴 만큼 많은 귀신이 들어 있어서 사람들이 쇠고랑과 사슬로 결박해 놓아도 그것을 끊고 돌아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귀신들에게 명하여 그 사람에게서 나오게 하여 그 사람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귀신들이 나오면서 거기 있는 돼지 떼들에게 들어가므로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바다에 빠져 몰사하였습니다.
여기 언급된 거라사인의 지방, 곧 귀신 들린 자의 활동 무대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필요로 하는 곳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치유 받아야 되는 세상의 모습인 것을 알게 합니다.

 

Ⅰ. 생명력이 정지된 도시입니다.

본문 말씀 26-27절에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1) 겉과 속이 다른 동네

귀신들린 자의 활동 무대는 죽음의 도시인 공동묘지입니다. 그곳은 생명 작용이 정지된 곳이며 사실상 시체들의 집단 부락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땅속에 묻는 것은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풍습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족장 때부터 가족 묘지를 만들어 놓고 시체를 굴속에 안장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창 23:19). 그들은 죽은 사람의 시체에 방부제를 바르고 향품을 넣고 세마포로 싸서 땅속에 묻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대리석으로 꾸미거나 공원을 만들어 화려하게 장식을 합니다.
이와 같은 무덤의 장식은 현대화된 문명시대에도 유행하는 풍습입니다. 마태복음 23:27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범죄한 인간의 실상이며 또한 위선으로 단장된 세상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인간의 지식과 과학이 이루어 놓은 물질문명의 화려함에 감탄하고 있지만 예수가 없는 인공문명은 공원으로 꾸며진 무덤처럼 생명을 잃은 도시요 공동묘지와 유사한 것입니다.

(2) 귀신들린 자의 놀이터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가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람이 귀신에게 사로잡히게 되면 사고가 흐려지고 생각이 바뀌게 되며 결국은 자기의 행동이 궤도를 이탈하고 맙니다. 자기는 스스로 옳다고 변명하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 상식에서 어긋나는 일만 하곤 합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전혀 해서는 안될 행동을 하면서 그것이 잘못된 것 인줄 모릅니다.
본문 말씀27절에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귀신의 하는 일입니다. 자기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어야 될 사람을 집밖으로 내몰고, 시체들이 있는 죽음의 동네로 거처를 삼게 하였습니다. 옷을 벗어 던지게 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품위를 잃게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부끄러움을 모르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가는 마귀는 멀쩡한 사람의 생명적 기능을 마비시키고 죽은 자의 세계로 이끌고 다니며 불행하게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3) 하나님과의 대적이 되게 합니다.

공동묘지는 시체들의 집단 촌으로 죽음의 도시입니다. 이 공동묘지도 물질문명의 발달과 함께 화려하게 변신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위치 좋고 전망 좋은 곳에 잔디와 꽃과 나무를 가꾸어 아름다운 공원으로 각광을 받게 하였습니다. 요즈음은 장묘 문화가 바뀌어지면서 화장을 하고 유골을 항아리에 담아 보관하는 납골 묘원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지 한가지 공통점은 겉으로 화려하게 꾸민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세속문화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동네를 살아 있는 사람의 집보다 더 많은 돈을 들이고 더 화려하게 꾸미면서 그것으로 과시하려는 세대이고 보면 이는 엄청난 모순과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가치전도(價値轉倒)의 현장에는 복음과의 관계를 차단시키고 있습니다. 생명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현장에 찾아오신 예수를 접근하지 못하게 방어망을 치는 것입니다(28절). 이러한 현상을 두고 사도 요한은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요 3:19).


Ⅱ. 무질서와 광란의 도시입니다.

마가복음 5:5에 보면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27절에는 그 사람이 오래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귀신들린 자가 자기 집을 뛰쳐나와 벌거벗은 모습을 하고 소리를 지르며 제 몸에 자해를 가하는 등 이성을 잃은 행동을 하면서 종횡무진 주름잡고 다니는 일이 거라사인 지방의 모습입니다.

(1) 무서운 괴력이 발휘됩니다.

마가복음 5:3-4에 보면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을 의지합니다(엡 1:19). 옛날 삼손은 손에 가진 것이 없었지만 여호와의 신에 사로잡히게 되어 맨손으로 사자를 찢어 죽이기도 하였습니다(삿 14:6). 오늘날도 죄악의 공해에 시달리며 힘을 잃고 곤비 해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능력의 새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사 40:31).
그렇지만 하나님께로 공급되는 힘이 아닐 때 자칫 인간의 완력이나 잘못된 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7:5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노아의 후손들처럼 인간의 힘으로 뭉쳐서 하나님께 도전하는 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사탄은 이들을 충동하고 그들로 하여금 힘을 가진 자가 무엇이나 마음먹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잇습니다.

(2) 다수의 세력이 작용합니다.

30절에 보면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군대 귀신은 떼가 많다는 뜻입니다. 많은 수를 이끌고 패거리를 만들어서 세상을 휩쓸고 다니는 세력을 뜻합니다. 이들에게는 법이나 원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이치에 맞고 안 맞고를 따지려 하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 기준도 없습니다. 많은 수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대세가 판가름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마귀가 활동하는 거라사인 지방의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언제든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많고 적음이나 대세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좌우하는 것입니다. 결국 군대귀신의 무서운 힘도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제압되고 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 통제불능의 상황으로 가는 것입니다.

29절에 보면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5:4-5에 “이는 여러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무절제하고 파괴적인 행동에 대하여 가족들이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이미 집을 떠나 버렸기 때문에 가정에서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쇠사슬과 고랑을 끊어 버리는 그 힘을 누구도 제어할 수 없습니다. 광란의 소리를 지르며 산과 들을 휩쓸고 다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만류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돌을 가지고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등 자해행위를 하지만 자기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현실을 개탄할 뿐 어떤 제도나 법으로도 통제가 안 되는 무책임과 혼란의 연속이 바로 마귀의 행동수법인 것입니다.

 

Ⅲ.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도시입니다.

곧 기독교 복음 전도의 대상 지역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하였습니다(롬 5:20). 그것은 복음 활동의 특수성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죄와 마귀의 권세 아래 죽음의 그늘이 짙어지면 반드시 거기에는 복음의 빛으로 조명을 받게 됩니다.

(1) 예수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이사야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9:12-13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죄와 죽음 아래서 불행하여진 인생을 찾아가셨습니다.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가신 예수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9:9-10).
여기 군대 귀신이 활동하는 죽음의 도시 거라사인 땅에 예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온갖 부도덕과 무질서와 죽음의 광란 극이 연출되는 그곳에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고 찾아갈 수도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그곳으로 진입하였습니다. 거기도 예수님의 활동영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활개치는 곳으로 복음의 불모지였기 때문에 예수께서 직접 들어가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였습니다(요 1:5). 또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11-12).
  
(2) 예수님의 능력이 행사되었습니다.

죽음의 도시 거라사인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셨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므로 그곳에는 이미 생명작용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귀신들의 독무대였지만 오로지 예수님만이 무질서와 혼란의 세계를 말없이 평정하고 새로운 생명의 질서로 회복시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귀신들린 사람의 반응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28-29절에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군대귀신의 많은 수와 막강한 힘이 작용하던 곳이었으나 거기 말없는 예수님의 모습만 보고도 귀신은 부들부들 떨고 있습니다. 31절에 귀신이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구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의 소원대로 무저갱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였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귀신의 요구를 들어 주셨는가 의아해 할 만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찾는다면 마귀를 무저갱에 가둘 때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계 12:12, 20:1-3).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마귀의 활동 기간을 허용하시고 그동안 마귀의 하는 일을 적절하게 이용하시는 것입니다. 잠언 16:4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대가를 치르게 하였습니다.

32-33절에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호수 가에 방목하던 돼지 떼들이 귀신들의 습격을 받고 비탈길로 달아나다가 호수에 빠져 몰사하였습니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주인은 돼지를 잃고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한순간 그 많은 재산을 날려버린 허탈함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였습니다(마 16:26). 비록 귀신들려 제정신을 잃고 사람구실을 못하는 자라 하더라도 주님이 보실 때 생명의 가치는 돈으로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것입니다. 이 생명 하나를 구원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많은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 위에서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있었기에 귀신들의 활동무대인 거라사인의 지방이 평정되고 희망을 찾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