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설교

장년
예람지기 2004.02.22 00:00:00
1608
  • 일자
    2004-02-22
  • 설교
    손상률 목사
  • 성경
    로마서 8:12~18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과거와 현재는 이미 단절된 상태에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 믿기 이전과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이후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8에 보면 그 때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때였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며 육체의 정욕에 따라 살아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는 새롭게 변화된 사람으로서(고후 5:17), 고상한 목표를 가지고 자기의 역할에 성실한 삶을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목적 있는 삶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대부분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역경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국 영광스러운 미래의 축복과 연결되는 삶이라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열매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시 126:5-6).
세상을 사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고 썩을 것을 거두게 되지만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성령으로 심고 영생을 거두는 자들입니다(갈 6:7-8).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기며 땅의 일만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은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거기로써 오는 그리스도를 대망하며 살고 있습니다(빌 3:18-21). 이러한 삶의 대가로 지불하는 고난이야말로 매우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 본문 말씀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Ⅰ. 성도에게 보장된 영광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하였습니다(벧전 5:1). 하나님의 자녀들은 괴롬과 죄가 많은 세상에서 날마다 죽음의 세력과 맞부딪치는 고달픔에 시달리지만 그래도 영광된 미래의 보장이 있기 때문에 소망 중에 사는 사람입니다. 로마서 8:24-25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자녀에게 보장된 영광입니다.

본문 성경에서 바울은 성도에게 하나님의 자녀 되는 신분이 주어졌음을 밝힙니다. 똑같은 세상 사람 중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사람은 겉으로 나타난 조건이나 자격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14절에는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15절에는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16절에는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고 하였습니다.
17절에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4:6-7에는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다윗은 비천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으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우셨다고 감격해 하였습니다(시 8:4-5).

(2) 후손이 받는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약속하신 축복과 영광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네가 눈으로 보는 땅을 모두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창 14:15-16). 또 그를 열국의 아비로 삼아서 그 후손이 선민의 대를 이어가며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자가 되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창 17:3-7).
이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계대(繼代)하는 축복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서 약속하신 축복을 자자 손손 누릴 수 있도록 법을 정하셨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통하여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였습니다(출 20:6).
출애굽기 19:5-6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그의 언약대로 믿음을 지키며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의 자손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 어느 때나 부모가 믿음으로 씨를 뿌리면 신앙인의 후손들은 축복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부모가 소중한 자식들에게 세상의 유업을 남겨 주려고 애쓰지 말고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어 하나님으로부터 영광된 축복을 누리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3) 내세에 받는 영광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살면서도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나라에 있고 거기로써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 하는 사람들입니다(빌 3: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대로 다시 오시는 날 죽은 자가 부활하여 천국의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확신을 가지는 사람들입니다(살전 4:16-17).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하늘에 영원한 성을 예비해 두셨습니다(히 11:16). 그때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되는 영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한 지경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5:31-34). 이는 마치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어 먹던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낙원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처럼 꿈과 같은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눅 16:19-25). 예수님께서는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하였습니다(마 13:43).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내세에 받게 되는 영광을 해와 달과 별과 같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41).

Ⅱ. 대가로 지불해야 되는 고난

본문 말씀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을 받게 되는 특권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특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받으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 고난을 먼저 받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2:2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1)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열두 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복음의 증거자로 내보내셨습니다(마 10:1). 그때 주님께서 당부하신 말씀 중에 그들의 길이 평탄하고 성공적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암시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0:16에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고 하였습니다. 17-18절에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들 이후 이 지구상에서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전도자들의 엄청난 고난과 피흘림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전도자의 사명을 각오하면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딤후 1:8). 그 자신도 복음을 인하여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딤후 2:9). 바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은 다 그리스도 복음 증거자의 사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 사명은 고난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5에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하였습니다.

(2) 몸된 교회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

골로새서 1:24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적인 의미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됩니다. 이 경우 그리스도는 머리가 되며 성도는 그의 지체가 됩니다(엡 1:22-23). 교회 안에 모든 지체들은 몸된 교회를 위하여 이바지하며 헌신하여야만 됩니다. 에베소서 4:12에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3:15에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지니는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교회는 진리를 파수하는 난공불락의 성과 같아야 됩니다. 흔히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일컬어 “전투하는 교회”라고 합니다(엡 6:10-17).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병(精兵)으로서 대적 마귀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 자들입니다(딤후 2:3).
바울은 밀레도에 모인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면서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행 20:28).

(3)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와 마귀의 세력에 맞서서 싸우는 싸움을 하여야 되지만 거기 못지 않게 힘든 싸움은 자기 자신과 더불어 싸우는 일입니다. 이 싸움은 눈에 보이는 대적과 싸우는 것보다 더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보이지 아니하는 세력 곧 강력한 육신의 소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언제든지 우리를 쳐서 넘어뜨리려 하고 우리의 속사람을 죄의 법 아래로 무너지게 만들려는 세력입니다(롬 7:23). 바울은 이 싸움의 고통을 여인의 해산하는 고통에다 비유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4:19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경건한 성도는 매일 같이 이 싸움을 싸우는 자입니다. 하루라도 이 싸움을 게을리 하면 자기의 영적 삶이 균형을 잃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9: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하였습니다.

Ⅲ. 고난과 영광의 손익계산

장사를 하는 사람이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먼저 투자와 이윤에 대한 손익계산을 하게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눅 14:28). 유능한 기업인은 언제나 적은 비용에 많은 이익을 추구하면서 사업구상을 하는 자입니다. 본문 말씀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겪게되는 고난과 그것으로 얻게 되는 영광은 확실히 저비용(低費用) 고부가(高負價)의 경제성이 있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같은 원칙을 가지고도 그 적용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17-18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1) 시간의 기준입니다.

여기서는 “잠간”이라는 말과 “영원”이라는 말로 시간을 대조시켰습니다. 즉 고난의 시간은 잠간이요, 영광의 시간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짧은 시간의 고난으로 영원한 시간 내내 누릴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된다면 누구라도 투자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마 13:11), 지체하지 않고 이 일에 뛰어듭니다. 한평생 고난과 영광의 비밀을 체험한 다윗은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고 하였습니다(시 30:5).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극심한 박해를 겪었던 베드로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벧전 5:10).

(2) 중량의 기준입니다.

고린도후서 4:17에는 “환난의 경(輕)한 것”과 “영광의 중(重)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환난과 영광의 무게를 비교해 보아도 상상이 안될 만큼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은 아무리 크고 힘든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고전 10:13).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영광과 보상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영역에까지 이르기 때문에 절대로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옛날 욥이 겪은 환난은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래도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졌습니다(욥 2:6). 그러나 훗날 그가 받은 축복과 영광은 이전 것보다 갑절이나 더했다고 하였으며(욥 42;10), 사실상 어디에도 비길 수 없는 최상의 것으로 보상받았습니다(약 5:11).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시면서 그 가치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6:26).

(3) 시각(視覺)의 기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과 물량적 기준으로 가치를 평가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그 가치를 찾고 있습니다. 로마서 8:24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하였습니다(히 11:1). 사도 베드로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7-8).
성도가 믿음을 지켜나갈 때 불가피하게 눈에 보이는 환난을 당하게 되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영광은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이며 또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8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