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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아프리카에서 살아 본 한국 외교관에 의해서 쓰여진 책 제목으로 아프리카를 잘 표현한 명언과 같다. 하지만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 아프리카는 없음과 죽음의 대륙이지만, 십자가 의미로 보면 인류를 새롭게 살릴 수 있는 고통의 땅이다. 그러면 고통의 땅이 어떻게 인류를 살릴 수 있을까?

 

십자가는 강함이 아니라 약함에 대해, 높음이 아니라 낮음에 대해, 환대가 아니라 버림 받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약함과 낮음 그리고 버림 받음이 단지 멀리하고 싶은 고통일 뿐이지, 십자가 복음의 비밀이 그 속에 있음을 잘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이 편하고 고통이 없는 삶을 원한다. 하지만 올림픽에 출전할 운동선수가 편하게 먹고 자고 마시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없다. 몸에서 땀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며 모질게 혹독한 훈련을 해야 하는데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으면서 편한 것은 바로 탈락이고 퇴출이다. 그 편한 것이 자기를 망하게 한다.

 

믿음의 경주인 제자의 삶이 이와 똑같다. 삶의 목표 즉, 우리에게 상실된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원하여 늘 십자가를 짊어질 것이다. 누가 십자가를 내려 놓으라고 해도 도와준다고 해도 절대로 그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가 바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가 인류에게 주는 메시지는 편안하고 안전한 삶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통은 과거와 미래에서만 아름답게 보이지 현재는 그런 것이 없다. 고통을 버리고 싶지만 고통 없는 날은 바로 영적 죽음의 날이다. 가족도 교회도 학교도 사회도 국가도 모든 것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 땅에 삶을 살아갈 때 고통을 피하려고 기도하지 말고, 그것들을 피하려고 신앙생활을 하지 말자.

 

하나님의 형생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것도 뜻한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십자가 아래서 자기 부인의 삶이며 부활까지 잠시 고통 가운데 지내는 순례자의 여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고통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니시고 무엇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고통이 아닌 것을 주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이 되게 하는 것은 영적 생명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차원으로 이끄는 것이다.

 

아프리카를 서구사회의 물질적 풍족한 삶으로 접근하지 말자. 즉,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기 보다는 그들 스스로 무엇이 되게 하자. UN을 비롯하여 수많은 NGO들과 교회까지도 빈곤한 아프리카에서 처음부터 무엇을 주려고 하는데 식량을 비롯하여 보이는 것만 주는 것은 아프리카 문화의 가치를 존중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을 받아서는 절대로 가난을 극복할 수 없다. 무엇이 되어야만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되게 하는 것인가?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슈바이처와 같이 아프리카에 와서 인류애를 실천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신사도 운동으로도 안 된다. 방언과 예언 그리고 병 고침으로도 어렵다. 현실과 실존 그리고 영적인 삶은 우리에게 더 철저한 고통을 요구한다. 즉 그것은 아프리카의 가난과 고난 그리고 죽음 속에서도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 외에는 되어질 것이 하나도 없다. 나를 비롯하여 한 영혼 한 영혼이 정확하게 이렇게 되어지면 성령께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신다.

 

그러므로 현실과 실존에서 얻는 고통이 영성이고 믿음이고 신앙이다. 아프리카 사람들 속에는 이 모든 것이 충만하게 살아 있다.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차고 넘친다. 그러나 그들 자신도 그것을 볼 수 없을 만큼 숨겨져 있다. 가난과 고난 그리고 죽음이 이것을 꼭꼭 숨게 만들었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마치 죽음과 같은 시험을 인내해야 한다. 인간은 시험이 없으면, 고통의 연단이 아니면, 절대로 자아를 부인할 수 없는데 그 자기부인과 함께 십자가를 직접 경험하면서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되어지는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일상이 되어버린 가난과 고난, 죽음 속에 영적 원리가 있다. 이것을 발견하기까지 아프리카 선교는 무엇을 주려고만 한다. 무엇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누구나 가난과 고난 그리고 죽음 때문에 좌절하며 방황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아니면 우리의 존재가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삶과 실존이 어렵고 힘들 때, 가난과 고난이 있을 때, 바로 그때만이 참된 자기 존재를 알게 되는 유일한 기회이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신다. 결국 어렵고 힘들고 없고 약하고 안될 때 바로 그 고통 안에서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되어지는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영적인 큰 인물로 보인다. 환란을 당하면서도 전혀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것 같은 자세, 빈곤한 가난 속에 살면서도 최대로 부한 자처럼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세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환난이 분노를 주고, 약함이 두려움으로 유혹하고, 가난이 비굴하게도 만들지만, 그들 속에 숨어 있는 영적가치와 본질적인 믿음은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가난과 고난 그리고 항상 죽음 속에 사는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삶의 방식을 조용히 귀 기울여 보면 어떻게 그들이 그 가난 속에서도 기뻐하며, 극심한 고난에도 감사하고 저주와 같은 죽음에도 온유함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 아프리카는 고통과 모순 무질서와 상실 그리고 죽음이 계속되어야 하는가?

 

어떻게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정말로 영적인 거장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죽음의 불청객인 에이즈와 말라리아로 가족을 떠나 보내면서 남은 자들은 눈물로 이웃 사랑을 배운다. 모순과 무질서 그리고 죽음이 시간을 멈추게 함으로 바쁨이 없다. 작열하는 낮의 태양과 사탄과 같은 밤의 모기가 공부를 방해해 자랑할 지적 우상도 없다. 생명이 숨쉬는 땅을 먹어버린 아스팔트와 무한 경쟁의 소비도시 그리고 고립된 아파트의 편리함은 없지만 육체의 본질인 흙과 투쟁하면서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의 밭을 만들며 대가족 농촌 공동체로 살아간다. 하나님과 사람과 동물 그리고 식물과 미생물까지도 단절될 수 없는 생태적 자연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된다.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소중함과 영적 진리가 차고 넘친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의 가난과 고난 그리고 죽음을 자세히 살펴보고 직시하면 그 모든 모순과 혼란과 고통 속에서 세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고통의 현상이 아닌 고통의 내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인간의 고통과 한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바른 의미를 깨달아 성령께서 주시는 생수의 강이 아프리카 대륙에 넘쳐 혼란한 시대에 고통 받고 방황하는 인생들에게 생명과 안식을 얻게 하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아프리카가 되기를 사순절에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