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암교회-자유게시판 (go SGHUAMCH)』 1237번
제 목:詩 한편...
올린이:긴여울목(김유석 ) 99/10/07 22:46 읽음: 18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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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저녁 나무 -김용택 詩伯에게
황지우
급식소로 밥 타러 가는 사람처럼
저녁을 받는 나무가 저만치 있습니다.
혼자 저무는 섬진강 쪽으로 천천히
그림자를 늘이는 나무 앞에 兄이 서 있을 때
옛 안기부 건물 앞 어느 왕릉의 나무에게
전, 슬리퍼 끌고 갑니다
그 저녁 나무, 눈 지긋하게 감고
뭔갈 꾹 참고 있는 자의 표정을 하고 있대요
형, 그거 알아요
아, 저게 '거룩하다'는 형용사구나
누군가 떠준 밥을 식반에 들고 있는 사람처럼
제 손바닥에 놓여진 생을 부러워할 때
혹은 손바닥을 내밀고 매 맞는 아이처럼
생의 빈 바닥을 아파할 때
저녁 나무는 이 세상 어디선가 갑자기
울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서 있나봐요
형이나 저나, 이제 우리, 시간을 느끼는 나이에 든거죠
이젠 제발 '나' 아닌 것들을 위해 살 때다, 자꾸
되뇌기만 하고, 이렇듯 하루가 나를 우회해서
저만큼 지나가버리는군요
어두워지는 하늘에 헌혈하는 자처럼 굵은 팔뚝 내민
저녁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는 저는, 지금 이 시간
세상 밖 강물 소리 듣는 형의 멍멍한 귀
잠시 빌려가겠습니다; 그 강에
제 슬리퍼 한 짝, 멀리 던지고 싶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