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작아져 한 뼘 인간이 되신 신비” ‘예수 같은 신’을 이해할 수 없어 세상은 그에게 무심하거나, 그를 왜곡하기로 했다 온 세상이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고 있다. 불빛인 줄 알고 이리저리 쫓아다녀 보지만, 어둠만 짙어질 뿐이다. 기독교 복음을 이 시대 언어로 깊이 있게 전달하는 팀 켈러가 이번에는 전 세계인의 축제 크리스마스 위에 수북히 쌓인 묵은 더께를 털어내고, 세상이 입힌 포장지 속에 감춰진 보배를 드러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신자는 물론이고, 비신자들조차도 자신이 예수 탄생의 이야기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돌아오면 교회마다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로 장식되고, 거리 곳곳에서, 또 미디어를 통해 목자와 천사와 예수 탄생에 대한 노래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그러나 정작 우리 중에 이 실화의 예리한 양날을 살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
2004년 11월 자끄 데리다가 세상을 떴을 때, 어떤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고급이론이나 인종-성-계급이란 삼총사의 뒤를 이어 앞으로 학계를 이끌 지적인 에너지의 중심이 과연 무엇일지 알고 싶어했다. 나는 흔쾌히 대답해주었다. 그것은 종교라고.
프롤로그. 소란한 축제에 가려진 한 사람을 찾아서
이 시대가 외면하는 진실
Part 1. 어느 날, 우리 곁에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셨다
눈먼 세상의 빛, 예수
1. 지금 이대로는 어둠에서 헤어날 인생이 없다
울고 있는 인생의 생명줄, 예수
2. 흠투성이 인생들을 ‘은혜의 식탁’에 둘러앉히시다
우리 중 하나가 되신 하나님, 예수
3. 당신을 혼자 두지 않기 위해 당신처럼 되셨다
가장 낮은 데로 내려오신 왕, 예수
4. 내 속에 날뛰는 ‘헤롯 왕’이 물러나야 한다
온 삶이 예수 생명에 젖다
Part 2. 처음 우리를 지으신 분이 우리를 ‘다시’ 지으신다
예수, ‘믿는 은혜’를 주시다
5. 믿음의 여정, 그분의 이끄심이 필요하다
예수, ‘보는 눈’을 주시다
6. 복음을 바로 보는 만큼 두려움은 힘을 잃는다
예수,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주시다
7. 마음을 찌르는 칼, 참평화를 위한 불화다
예수, ‘그분 자신’을 주시다
8. 되찾은 그 이름 예수, 이제 감출 수 없으리라
주
감사의 말
어둠 속의 불빛을 강조하는 풍조는 세상의 희망이 세상 바깥에서 온다는 기독교의 믿음에서 기원했다. 또 선물을 주는 행위는 자기 목숨까지 내어 주신 예수님께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예수님은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인간으로 오셨다. 어려운 형편의 이웃을 향한 관심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회 상류층이 아니라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셨음을 환기시켜 준다. 우주의 주인께서 인류의 가장 작고 소외된 이들과 같은 처지가 되신 것이다. 이 모두가 가슴 뭉클한 주제지만, 사실은 양날을 가진 검이다. 예수께서 빛으로 오신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너무 눈멀어 있어 스스로는 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인간이 되어 죽으신 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너무 타락해 다른 식으로는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주셨으니 우리도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처럼) 크리스마스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경이롭고 더 치명적이다.
--- pp. 12-13
기독교는 ‘우리가 최대한 애쓰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미래의 디스토피아만내다보는 비관론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문제가 아주 심각해서 우리 스스로는 치유나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세상은 심히 어둡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보다시피 세상에서 빛이 솟았다고 하지 않고 세상에 빛이 비친다고 했다. 그 빛은 바깥에서 왔다. 이 세상 바깥에 빛이 있으며,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빛을 가져오셨다. 아니, 좀 더 확실히 말하면 그분이 바로 그 빛이시다(요 8:12 참조).
--- p. 27
그렇게 용감해질 힘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된다. 당신이 그분과 함께 있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분이 당신과 함께 계시는 데는 무한히 더 용기가 필요했다. 용기가 하나님의 속성인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용기가 필요한 신은 다른 어느 종교에도 없다. 패커가 지적했듯이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 흘려 씨름하시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셔야만 했다. 그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 되어 고난과 배반과 죽임을 당하셨다. 이 모든 일을 당신을 위해 당하시며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셨다. 당신을 위해 어둠에 직면하시는 그분을 보라. 그러면 당신도 어떤 어둠에든 능히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 pp. 98-99
그녀에게서 보듯이 믿음의 반응은 지성까지도 포함하는 전인적 경험이다. 현대인들은 오래된 문서를 읽을 때 교만한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옛날 사람들은 다 지금 우리보다 지능 지수가 낮았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는 그 당시 사람들이 미신에 빠진 데다 귀가 얇아 무조건 아무 말이나 덥석덥석 믿었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2천 년 전이라 해서 사람들의 지능이 조금이라도 모자랐던 것은 아니다. 천사가 나타나 말을 건다면 당신도 마리아와 똑같이 반응할 것이다. 당신과 나는 초자연적 세계를 믿지 않도록 문화적으로 교육받았다. 앞서 보았듯이 유대인인 마리아도 행여 하나님이 인간이 되실 수 있다는 개념을 믿지 않도록 문화적으로 교육받았다. 따라서 천사가 전한 메시지를 믿지 못하게 그녀를 막아 선 장벽은 종류만 달랐을 뿐 당신 앞의 장벽과 똑같이 높았다. 그런데도 증거와 체험이 합해져 그 장벽을 허물었고, 마리아는 결국 믿었다. 믿음의 원리는 지금도 똑같다. 그녀는 회의와 의문을 품었고 이성을 움직여 질문했다. 오늘날 우리도 믿으려면 똑같이 해야 한다.
--- pp. 132-133
결국 믿음은 언제나 지적인 동의와 본분을 뛰어넘어 자아 전체인 지정의(知情意)를 아우른다. 믿음을 가지는 데 왜 이렇게 시간이 걸리며, 믿는 과정이 제각기 다를까? 참된 믿음은 우리 스스로 결심해서 구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당신의 통제 소관이 아니다. 앞 장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내 인생의 주관자가 내가 아니라는 개념에 깊은 반감을 느낀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예수님을 믿을 능력이 없다. 지난 세월 나는 순전히 믿음을 만들어 내기로 결단한 뒤 그 계획을 실행함으로써 믿음에 이른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아니,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여시고 편견과 부정(否定)을 깨뜨려 주셔야만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한 표지는 외부의 어떤 능력이 당신을 지목하고 다가와 직접 당신을 다루어 주셨다는 인식이다. 그 능력 덕분에 당신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보고, 그것이 진리임을 깨닫고, 능히 기뻐하며 자신을 드린다. 처음에 당신을 지으신 분이 당신을 다시 지으신다(딛 3:4-7 참조). 마리아에게 해 주신 것처럼 그분이 오셔서 자신을 계시해 주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그분을 찾을 수 없다.
--- pp. 139-140
여기서 또 한 번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전형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당신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삶에 모시면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이다. 내면에 갈등이 생기고 때로 혼란과 심한 고통이 따를 것이다. 뭔가를 잘못 알기도 할 것이다. 그분과 싸울 수도 있고 당신 자신과 싸울 수도 있다. …(중략)…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많은 싸움이 끝나거나 거의 끝난다. 자신을 입증하려는 씨름, 자신의 정체를 발견하려는 씨름, 고난까지 소화하게 해 줄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씨름, 참된 만족을 얻으려는 씨름, 이 모든 싸움이 해결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으면 전혀 새로운 차원의 분투가 촉발된다. 그래서 라일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아는 기준이 새로운 평화만이 아니라 또한 새로운 갈등이라고 했다.
--- pp. 190-191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상한 행위와 성취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행위로 시작된다. 바로 겸손히 구하는 일이다. 그러면 시간이 가면서 우리 안에 생명과 기쁨이 자라는데, 역시 평범하다 못해 거의 따분한 실천들을 통해 자란다. 매일 순종하는 것,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것, 예배에 참석하는 것,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와 이웃을 섬기는 것, 환난 중에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 등이다. 이렇게 조금씩 믿음이 자라면서 우리 삶의 기초는 기쁨의 지하수 쪽으로 점점 더 다가간다. 기쁨의 통로가 평범하다 해서 거기에 구애받지 말라. 그 평범함 속에 복음의 비범한 풍요로움이 숨어 있다. 세상이 늘 범해 온 과오를 당신은 범하지 말라. --- p. 214
소란한 현실에 묻힌 존귀한 이름, 그리스도 예수
그가 이 땅에 온 역사적 실화를 되짚다
팀 켈러는 서두에 “크리스마스 시즌은 한 해 가운데 세속 사회와 교회가 조금이나마 비슷한 것을 생각하는 유일한 때라면서, 크리스마스를 올바로 알아야 기독교의 근간인 예수 복음을 바로 알 수 있다”라고 이 책을 쓴 이유를 밝힌다. 팀 켈러는 이 책에서 크리스마스마다 등장해 유명해진 성경 구절들 중 몇을 다룬다. 1부에서는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으나 이 시대가 잃어버린 선물, 그리스도 예수를 찾아나선다. 또한 2부에서는 누가복음을 중심으로 우리가 그분을 더 이상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길로 안내한다.
누구를 위한 책인가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책이기에 비신자들에게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전도용 선물로도 매우 좋다. 또한 크리스마스에 말로는 예수님 생일을 축한다고 말하면서 실은 비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엉뚱한 것들을 기대하며 그날을 보내는 신자들을 일깨워 교회 절기나 공휴일이 아닌 성육신과 구원의 감격과 감동을 회복하도록 돕는다. 이상과 현실 사이, 영원과 시간 사이를 뚫고 우리 사는 세상에 하나님이 오셨다. 약속대로 오셨던 예수님은 약속대로 마지막 그 날에 다시 오실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를 찾아 이 땅에 오신 예수의 이름을 되찾고, 그분이 다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새롭게 결단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