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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술 2000.03.30 23: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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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유일하게 보존돼 있는 'ㄱ'자 교회

양반 상놈 위계 허물고 민주 공동체 이룬 금산교회 와 3선 총회장 이자익목사 이야기


전북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290-1번지에 소재한 금산교회(담임 이인수목사) 뜰안에는 한국교회에서 유일하게 보존돼 있는 기억자 교회가 서있다. 이 교회는 1997년 정부로부터 문화재로 지정돼 개신교 전래 초기의 교회 건축양식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되고 있다.
금산교회 초대 기억자 예배당인 이 교회는 다섯간짜리 로서 남자석과 여자석이 엄격히 구분돼 있다. 철저한 유교 문화권안에서 살던 한국인은 남녀 유별에 대한 차별화를 꾀해 남녀가 일곱살만 되면 자리를 함께 해서는 안된다는 "남녀칠세 부동석"(男女七歲 不同席) 원칙은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터부였다. 기독교도 이 금기 사항을 깨뜨릴수 없는 당시 상황에서는 예배당을 지으면서 기억자 건물을 지었고 남자석과 여자석의 경계를 엄격히 그었던 것이다.
내가 금산교회 뜰안에 있는 기억자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 옛날 우리가 보고 자라온 익숙한 건축양식이 선뜻 눈에 뛴다.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라보니 남자석 상량과 여자석 상량의 글이 다르다. 같은 고린도전서 3장16절 - 17절의 말씀인데 남자석은 한자로 기록돼 있는데 반해 여자석은 한글로 기록돼 있다. 당시의 교육문화가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당시 조선의 교육이라는 것이 그랬다. 남자는 서당에 나가 한문을 읽었고 여자는 진서(眞書)를 가르쳐서는 안된다고 한글 교육을 시켰다. 그것도 귀한 신분이 보장된 집의 경우에 한정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시하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리라"

금산교회가 설립된 것은 전주지방에서 선교한 테이트(최의덕)선교사에 의해서 였다.
김제지역은 남장로교 선교사 전위렴목사가 선교를 담당했다. 그런데 이 지역은 동북과 서남지역으로 나뉘어 선교 행위가 이루어졌다. 서남지역은 김제 선교부의 전위렴목사가 담당했는데 동북지역은 전주와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전주선교부에서 선교를 담당하던 최의덕선교사가 담당하게 되었다.
최의덕 선교사는 바쁜 선교 사역을 수행하는 가운데서도 틈만 생기면 꿩사냥을 즐겼다. 그래서 그는 그의 조사들을 이끌고 모악산에 올라 수렵을 즐기곤 했다. 모악산은 지리적으로 금산면 뒷산으로 그곳에 유명한 금산사라는 절이있다. 이 절이 그 유명한 신흥종교의 메카이다. 한 때 어떤 신흥종교 교주는 1천 여자와 도수를 맞추면 생불(生佛)이 된다고 믿던 나머지 105동 마을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산이 유심하다보니 온갖 신흥종교의 산실이 된 것이다.
최선교사는 꿩 사냥을 나갈 때면 김제군 수류면 팟정리에 있는 마방(馬房)에 말을 맡기고 쉬기도 하고 그곳에서 쉬어가는 유숙객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도 했던 것이다. 최목사의 어학 실력은 완벽하여 말소리만 듣고는 서양 사람인줄 모를 정도였다.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마방 사람들에게 접근해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
"예수 믿으십시요. 예수는 우리 인류의 구주이십니다. 믿으면 살고 믿지 않으면 죽습니다"
마방에는 이자익(李自益)이라는 사람이 마부일을 보고 있었다. 마부는 백정이나 사당지기 만큼이나 천한 신분이 되어 동리 사람들로 부터 하대를 당했다.
그는 천민이 되어 눌려 살면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최목사의 전도 말씀에 감동되어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그가 예수를 믿자 그와 비슷한 동년배 청년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조덕삼, 박화서, 왕순칠. 강평국이 최목사의 전도에 마음을 열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태어난 교회가 두정교회, 또 팟정리교회, 후에 금산교회가 된 모체인 것이다.
최의덕목사가 세운 팟정리교회는 한국교회 어느 교회도 흉내낼 수 없는 그들만의 자랑이 있다.
그 자랑중 하나는 팟정리교회에서 처음 예수를 믿기 시작한 청년 이자익이 후에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한국 장로교 총회 창립이래 최초로 3선 총회장에 당선된 것이다. 이런 일은 외국 선교사는 물론 한국인 목사 가운데는 한 사람도 없는 일이다. 다만 외국인 선교사 중에 총회장을 두번 역임한 이는 세 사람이 있다. 언더우드, 기일, 마팻이 그 사람이다. 그런데 유독 이자익 목사만이 전무후무하게 12회, 33회, 34회 총회에서 3번이나 총회장에 당선되어 어려운 총회 일을 처리했다.
또 다른 자랑중 하나는 금산교회(팟정교회)가 양반, 상놈이라는 계급을 허물고 민주 사회를 만들었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이다.
이자익과 함께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였던 조덕삼(趙德三)은 김제 땅은 물론 전주에서도 떵떵거리든 토호(土豪)였다.
조덕삼의 5대조 할아버지는 평양 사람으로 만주와 북경을 드나들면서 무역을 하든 사업가였다. 그렇든 그가 전북 땅 금산으로 이주를 해 온것은 금산땅에 금이 많이 난다는 소문을 듣고 금산으로 내려와 터를 잡으면서 부터였다. 그는 금산 땅에서 금광을 가지고 노다지를 캐며 많은 돈을 모았고 그 튼튼한 재력을 바탕으로 땅을 사들여 전북땅을 밟는 사람치고 그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다닐 수가 없었다고 한다.
조덕삼은 거부답게 성격이 호방했다. 돈많고 인물 훤칠한 장부가 되다보니 그의 집은 항상 젊은 손님들로 들끓었고 술잘먹고 노래 잘하는 귀공자였다. 또 그는 한학에도 조예가 깊어 전라도 지방에서는 일약 한학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이조 시대의 양반들은 오만하기 짝이없었다. 조덕삼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거부인 그의 집에는 소작인들을 포함해 수십명의 노비가 있었다. 마부로 채용된 이자익도 당시로서는 조씨 일가의 하인이었다. 그런 오만한 조덕삼에게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가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교인이 되므로 그 높은 콧대를 꺽고 겸손한 기독교인으로 다시 태어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반상의 구별을 타파하고 높고 낮음도 없는 형제애로서 교회를 이끈 것이다. 복음이 위대한 것인가? 조덕삼이 민주적 시민 기질을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인가? 교회 사학자 김수진은 그의 책 '호남기독교 100년사' p219에서 조덕삼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조덕삼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자신의 돈을 믿고 자신을 억압할 수 있는 세력은 없다고 자부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민중의 삶속에 뛰어 들어가 자신의 하인겸 마부로 일하든 이자익과 함께 팟정리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이자익은 전라도 익산 사람이 아니다. 그는 경상남도 남해가 고향이다. 그런 그가 김제 땅까지 흘러들어온 것은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서 였다.
그는 당시의 여느 아이들 처럼 서당에서 한문을 읽었다. 6세부터 16세 까지 읽었으니 11년을 읽은 것이다. 그는 사서삼경을 보지 않고도 줄줄 외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나이 16세때 그의 부모가 돌아가시자 천애 고아가 된 그는 먹을 것을 찾아 개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전국을 순회하기에 이르렀다. 전국을 그렇게 떠돌던 그는 전북 김제까지 와서 조덕삼의 집 마부가 되어 식생활을 해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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