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은?
본문: 요5:1~9
설교: 한홍식 목사
▲평촌이레교회 한홍식 담임목사 |
거리에는 각양 각처에서 온 유대인들로 넘실거렸으며, 잔치를 베풀고 서로 예물을 주고 받으며 즐기는 인파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을 것이며,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평안과 기쁨을 나누는 복된 교제도 있었을 것이다.
한 편,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이 있었다. 거기에는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는 각종 질병, 즉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등등... 한 마디로 말하면 중증 질병을 앓으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저들, 병자들이 베데스다 못가에 이렇게 진을 치고 있었던 이유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던지 낫게 되기 때문이다. 언제 천사가 내려올 지, 언제 물이 움직이게 될 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냥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다. 이 기다림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그것도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가 고침을 받는다고 하니, 가장 먼저 들어가기 위하여 한 눈을 팔 수 있겠는가? 잠인들 편안히 잘 수 있겠는가? 서로가 경쟁 상대이다. 저 사람보다 내가 먼저 들어가야 하는 절박함 속에서 무슨 사랑이 있고 긍휼이 있고 자비가 있겠는가? 그야말로 서로 견제하는 살벌한 경쟁만이 있을 뿐이다.
이때 우리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의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 예수님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직행하지 아니하시고 베데스다 연못으로 향하셨다. 그리고 거기에서 38년 된 병자를 만나시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이 환자를 보시자 직감적으로 아주 오래된 환자임을 아셨다. 그리고 대뜸 이렇게 물으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때에 이 환자의 대답이 이것이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
“나를 물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다.” 본문의 이 환자의 한 맺힌 절규가 단지 지난 2,000년 전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환자의 절규만이 아니라, 오늘 인생들의 절규가 아닌가? 유월절! 기쁜 날이다. 감격적인 날이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고 지난 날 자기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에 행하신 위대하신 일들에 감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바로 옆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에서는 천사가 내려와 물을 흔들 때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가면 고침을 받게 된다는 미신적 전설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처절하게 살아가는 인생들이 있었다. 참으로 아이러니이다. 누구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마음껏 춤추고 마음껏 찬송하고, 마음껏 먹고 마시고 신나는 즐기는가 하면, 누구는 이렇게 언제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미신적 전설에 한 가닥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
38년 된 환자의 하소연,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다.” 이 말이 언뜻 이해가 되질 않는다.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베데스다 연못가를 지나 얼마나 많은 인파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그런데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이 환자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자가 없었다니? “날 좀 도와주세요. 나를 못에 좀 넣어 주세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이 병자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말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는 그 많은 종교인들, 제사장들! 다 어디 갔는가? 이 사람의 한숨, 이 사람의 눈물, 이 사람의 하소연, 이 사람의 피 맺힌 절규를 들어 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단 말인가?”
최소한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의 제사를 올리는 사람들은 이 환자의 절규를 들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남들이라면 몰라도 최소한 하나님께 제사하는 자들이라면 한 번 쯤 이 환자를 업고 물가까지 내려갔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열심 있는 종교인들 어디 갔는가? 거룩한 제사장들은 어디 갔는가? 율법의 전문가요 율법 선생인 바리새인들은 어디 갔는가?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은혜 받았다. 복을 받았다. 감사하다. 감사하다.”하는 동안, “기적을 체험 했다. 방언 받았다. 예언도 한다. 환상도 본다. 성령도 받았다.”하는 동안, 바로 교회 밖에서는, 바로 우리 이웃은 “내가 이렇게 외로운데, 내가 이렇게 고독한데, 내가 이렇게 답답하여 한숨만 지으며 죽고 싶기만 한데, 그런데 누구 한 사람 따뜻하게 손잡아 주는 자가 없다. 누가 한 사람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람 없다.” “나도 당신들처럼 예수님 만나고 싶다. 당신들처럼 구원 받고 싶다. 당신들처럼 기쁘고 즐겁고 감격스럽게 찬송하고 싶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나를 예수에게 인도하는 자가 없다.” 영혼으로 절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본문은 이 불쌍한 환자를 지나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수많은 유대 종교인들을 향한 강력한 충고의 멧세지이다. “너희들, 이 불쌍한 병든 자의 피맺힌 절규를 외면한 채 그 많은 기름진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고 춤을 추고 찬송하고 축제를 벌이면 뭐하냐?” 그러니까 말 그대로 ‘그들만의 리그’를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이 세상은 베데스다 연못이나 다를 바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이처럼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하는 자들이 수없이 많다. 그래서 저들은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게, 누구 나를 예수에게로 인도할 사람이 없소?”
오늘 우리끼리 구원을 노래하고, 만끽하는 사이에 행여 교회 밖의 영혼들의 탄식소리를 듣지 못하는 또 다른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해 본다.
출처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56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