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4~6)

<서론>
오늘 저는 “동굴과 터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겉으로 보기에는 동굴이나 터널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다 땅굴이니까. 그러나 무엇이 다르냐. 동굴은 들어가면 감옥입니다. 나올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터널은 아무리 어둡고 캄캄하고 땅 밑의 깊은 굴이라도 나갈 곳이 있습니다. 터널은 들어가면 나가는 길이 있는데 동굴은 들어가면 나가는 길이 없어요. 우리가 일생이 동굴과 같을 수도 있고 터널을 가지고 인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시련은 크고 작은 동굴입니다. 이 세상에 그렇기 때문에 절망이 있고 좌절과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같은 동굴인 것 같지만 반드시 출구가 있습니다. 그 출구가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면 그리스도는 어떠한 동굴도 터널로 만들어 놓고 마는 것입니다. 왜 인생을 살아가는데 동굴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동굴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동굴이 있어요. 여러분, 북극 탐험을 하는 우리 탐험대들이 크렉에 빠져서 생명 잃은 적을 신문에 난 것 보았지요? 얼음 동굴 속에 떨어져서 나오지 못하고 죽은 사건인 것입니다.

<본론>
1. 동굴이 생긴 원인

오늘날 우리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벌써 동굴에 빠져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악의 동굴에 빠졌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가 아니더라도 조상이 죄인으로써 우리를 세상에 낳았기 때문에 죄악의 동굴에서 빠져서 그곳에 허덕여 예수님 도움이 없이는 결코 나오지 못하고 동굴에서 죽습니다. 허물의 동굴, 사람들은 허물이 많습니다. 오늘날은 더구나 게임 중독의 허물이 한 사람을 죽으면 어린이나 늙은이나 할 것 없이 그 동굴에서 허덕이며 인생 파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질병의 동굴도 있어요. 이 질병 하나 고치면 다른 질병 다가오고 또 어떤 질병 고치면 더 무서운 질병이 다가오고 끊임없이 인생은 질병의 동굴에서 허덕이며 완전히 병에서 해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 죽음의 동굴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한번 들어가고 난 다음에 나오질 않아요.

어제 제가 어떠한 교회단체에 인터뷰를 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참 훌륭한 목사님이었습니다. 저보고 그 목사님 현재 무덤에 들어가셨는데 할 말이 있느냐. 무덤에 들어간 사람보고 내가 무슨 말을 합니까? 그래서 제가 기왕 인터뷰하러 나왔으니까 말은 해야 되겠고 야 이 사람아, 무덤에서 뭘하나 빨리 오너라. 여기 인터뷰하고 있다. 빨리와서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그런데 사람들이 웃지 아무도 그 사람 나오는 것 못 보았어요. 제가 나오라고 했는데 안 나왔어요. 살아있을 때 같으면 좋다고 나왔을 것인데... 죽음의 동굴에 들어가면 나오지 못합니다. 아무리 친해도 못나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비극인 것입니다. 아담이 생명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떠나자 마귀의 종이 되고 그 다음부터 이 죄악의 동굴, 허물의 동굴, 질병의 동굴, 가난과 낭패의 동굴, 죽음의 동굴이라는 감옥에 들어가서 허덕이며 못나오고 발버둥치다가 일생을 끝마치고 마는 것입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났을 때,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 장군은 동경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연설의 마지막 부분이 매우 인상적인데 이렇습니다. “온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경제 문제입니다. 경제 문제는 군대 문제입니다. 군대 문제는 정치 문제입니다. 정치 문제는 정치가의 양심 문제입니다. 양심 문제는 도덕적인 문제고 도덕적인 문제는 즉 종교의 문제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모든 문제의 가장 근본은 종교 문제이므로, 종교가 바로 서야 양심이 바로 서고, 정치가 올바르게 되어야 평온한 가운데 경제가 살아난다고 말한 것입니다.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이런 시를 적었습니다. “모든 범죄는 그 속에 천벌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고통의 씨를 품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모든 문제 해결의 근본에는 종교가 있고, 종교가 바로 서야 위기에서 나올 수가 있는데 그 종교를 바로 세우는 것이 예수님을 믿고 양심을 바로 세우면 그를 통해서 동굴에서 나오는 문이 우리의 생활 속에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이나 가정, 생활, 사업에서 고통을 하고 몸부림을 치는 것은 들어가면 못나오는 동굴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캄캄한 동굴 속에서 갈길을 모르고 방황하고 허덕이고 고통을 당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피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곳이든지 동굴에 문이 열리면 터널이 되어서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동차 타고 요사이 서울 시내나 지방을 내려갈 때 동굴을 통해서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보면 터널입니다. 바깥에 나가는 문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반드시 동굴은 터널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떠난 죄
하나님을 떠난 죄는 불신앙과 불순종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6절로 17절에 “야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 말을 아담과 하와는 안 믿었습니다. 그리고 먹지 말라는 것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손을 내밀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9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가난의 동굴입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죽음의 동굴입니다.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우리가 지금 당하는 이 고통은 모두다 아담과 하와가 불신앙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들어온 동굴입니다. 이 동굴에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신앙과 불순종의 동굴에 굴을 뚫어야 되겠습니다. 누가 뚫어줘야 되겠어요. 죽음의 동굴, 죄악의 동굴, 불의의 동굴, 질병의 동굴, 저주의 동굴, 절망의 동굴을 뚫어줄 사람이 누굽니까? 그 보통 뚫는 것이 힘이 들 정도가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뚫을 수 없습니다. 그런 무서운 동굴입니다. 그를 뚫기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 그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그 6시간 동안 주님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힘든 고통을 겪으면서 죄악을 뚫었습니다. 허물을 뚫었습니다. 질병을 뚫었습니다. 저주를 뚫었습니다. 죽음을 뚫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할 때 마지막 삽을 던진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동굴을 터널로 만들어 놓고 만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터널이 있습니다. 들어오는 길이 있으면 나갈 길이 있는 것입니다. 죄악에서 나갈 길이 있어요. 허물에서 나갈 길이 있어요. 병에서 나갈 길이 있어요. 저주에서 나갈 길이 있어요. 죽음과 지옥에서 나갈 길이 있어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주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한 예수님이 바로 동굴에서 터널로 들어가는 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캄캄한 동굴 속에 들어갔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 그 동굴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가운데서 문이 되어 열려서 터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같이 계심이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동굴에서 주님이 같이 계시면 터널문이 자기와 같이 있기 때문에 주의 지팡이, 막대기, 주님의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권능과 권세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문인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고난이 있어도 예수님이 계시면 우리는 해를 받지 않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주님이 우리의 해결책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밥상차려 주시고 기름 부어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잔이 넘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꼭 원수가 와야 그것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원수가 없는데 주님 밥상 안차려 줘요. 원수가 오면 밥상 차려 주고 성령 기름 부으셔서 일을 성공시켜서 잔이 넘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캄캄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든지 원수의 공격을 받아서 고난당하든지 예수만 있으면 그 땅굴은 터널로 변화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의 죽으시는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삶의 동굴에서 출구가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히브리서 10장 19절로 20절에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구약의 생수는 지성소와 성소의 휘장에 가려 있습니다. 그 휘장에는 아무도 못들어가요. 1년에 제사장이 한번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제사를 드릴 따름이지 못들어가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운명할 때 가장 큰 변화는 하나님이 성소에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로 하나님께 못들어도록 휘장을 쳐 놓았는데 그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쫙 찢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캄캄한 휘장이 찢어져서 하나님의 광명의 빛이 우리에게 태양처럼 비치고 이제 예수 이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막힌 휘장이 찢어지고 동굴이 터널로 변화되어서 아버지 앞으로 나가는 길이 열려버린 것입니다.

지금 아버지의 사랑이 햇빛처럼 여러분에게 비취고 여러분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의 품 속에 뛰어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는 사랑의 관계요, 사랑이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베풀어 주는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정의가 무엇이냐고 말합니다. 여러분 정의는 사랑이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정의는 율법으로써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옛날 구약시대에 인간중심의 낮은 단계의 정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하는 정의는 여러분, 율법으로써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용서와 의와 영광을 선물로 주는 것이 정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여러분의 죄, 나의 죄, 우리의 불의, 여러분의 불의, 추악, 저주, 절망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셔서 그 속에서 우리에게 용서를 주시고 의를 주시고 거룩함을 주시고 치료를 주시고 축복을 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사랑이 최고 선물이요, 하나님의 정의는 사랑이 정의인 것입니다. 사랑을 베푸는 것이 정의인 것입니다. 심판을 베푸는 것이 정의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은 심판을 베푸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해서 돌로써 사람을 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으로써 덮는 것이 그 정의인 것입니다.

제가 자꾸 이 말을 해서 여러분 귀에 못이 박힐는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이 성전 뜰에서 가르칠 때 율법주의자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예수께 끌고와서 그 발 앞에 던졌을 때 성경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7계명에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는 자는 쳐 죽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쳐 죽이라고 했어요. 그것은 율법입니다. 정의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와서 주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율법대로 집행해야 되겠는데 그 정의는 이 여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은 최고의 증인인 하나님이신데 예수님이 정의를 어떻게 판단하시는가 보십시다. 예수님이 그래 좋다. 내가 먼저 돌로 칠테니 너희들도 돌을 치자. 하나, 둘, 셋, 쳐라~ 돌이 비오듯이 떨어져서 그 여자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습니다. 아무도 예수님 잘못했다고 말 안합니다. 정의를 실천했으니까. 죄를 지은 영혼은 죽으리라. 죄를 지은 육체는 돌에 맞아 죽으리라.

그런데 예수님은 정의를 실천하는데 그런 인간적인 정의를 실천하지 않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남에게 정의를 실천하기 전에 너부터 먼저 정의를 실천하라. 남의 허물 들춰내기 전에 네 허물부터 먼저 드러내어라. 남 벌거벗기기 전에 너부터 먼저 더러운 옷을 벗어 보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정의를 실천하라. 인간이 말하는 낮은 단계의 율법적인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죽여라. 그 사람이 정의를 실천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들은 돌을 다 버리고 다 도망쳤습니다. 왜냐, 주님께서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데 그들의 지은 죄를 낱낱이 다 적어내는 것입니다. 그 여자에게 행한 인간의 정의의 심판은 결국 자기들에게 심판을 선언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뭐라고 말했습니까?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가서 다시 죄를 짓지 마라. 용서와 사랑이 하나님의 정의인 것입니다.

여러분 정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용서와 사랑을 베푸는 것인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사람으로 죄를 짓고 또 짓고 또 짓습니다. 인간은 조그만큼 발전하고 조그만큼 발전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여러분을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하느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 갈대가 지금 상해서 바람에 휘청휘청 하면서 끊어지려고 하는데 주님이 그걸 쳐내어서 상한 갈대가 꺾이지 않게 하시고 심지가 꺼져갑니다. 기름이 없어서... 후~ 하면 꺼져 버릴... 여러분의 생명이 간들간들 합니다. 그것 나쁜 놈의 자식 게으르게 있다가 저 모양이다. 꺼버려라. 후~! 그러면 사람들은 박수를 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불어서 끄지 않고 가서 그 불을 감싸서 자기 기름을 부어 주셔서 활활 생명으로 타오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정의입니다. 그게 뭡니까? 용서와 사랑인 것입니다. 최고의 정의는 용서와 사랑인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개인을 변화시키고 가정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의로써 심판을 내리므로 가정이 화평하게 안됩니다. 남편을 심판하고 아내와 화합이 안됩니다. 아내를 심판하고 화합되지 않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칭찬하고 그리고 서로 얼싸 안으면 그곳에 평화가 오고 행복이 오고 가정이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정의인 것입니다. 인간적인 정의에서 우리는 돌아서야 되는 것입니다. 돌로써 치는 정의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의 정의를 베풀어서 우리는 끌어안아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말고 꺽어진 갈대를 꺾지 말아야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려면 우리 전부 심판을 받아 죽어야 된다. 십계명에 안 걸린 사람 어디 있어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을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 거기에 하나도 안 걸리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하나라도 걸리면 죄를 지은 사람은 죽으리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 죽였으면 이 자리에 아무도 와서 앉아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 내려다 볼 때 여러분 얼굴은 없고 시체만 볼 것입니다. 시체도 못보지요. 나도 죽었을 테니까... 시체만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정의를 그렇게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죽느냐.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고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서 정의를 세우신 것입니다. 정의를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낮은 단계의 정의도 실천했는데 죄는 다 하나님이 다 대신 걸머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청산하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서 여러분과 나에게 정의를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정의가 무엇이냐고 많이 질문하는데 여러분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우리가 생각해야지 사람 편에서 생각하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이 있기 때문에 한평생을 살면서 감사하고 기쁜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도 교육이 없고 출신이 천하더라도 남녀 노유 빈부 귀천 차별하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예수님을 내 가슴 속에 무셔드리면 예수님 자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길을 안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리를 가르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길을 생명이 있는 곳에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동굴에서 터널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어떠한 동굴도 터널로 변화시키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모시면 여러분 문제에 해결책이 나옵니다. 여러분의 동굴에 터널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캄캄하던 앞날에 저 터널 입구에 밝은 빛이 비취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용서가 있습니다. 예수 안에 거룩함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건강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이게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다른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너가 더 공부해라. 너가 더 노력해라. 너가 더 수양해라. 너가 도덕을 더 닦으라. 그래서 동굴을 터널로 만들어라. 죽도록 손톱이 다 뒤틀려도 해도 동굴을 터널로 못 뚫어내요. 우리 힘으로 안돼요. 그러나 다른 종교는 전부다 너희 힘으로 뚫으라고 합니다. 더 많이 굶으라. 더 많이 수양과 도덕을 닦으라. 그런데 수양과 도덕 닦는 것 얼마나 힘듭니까?

3.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명령에 믿고 순종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절망의 동굴을 전부 터널로 뚫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사망의 동굴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없이는 안돼요. 예수를 만나야 돼요.

시편 23편 4절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음침한 골짜기에 주님이 같이 계시면 동굴이 터널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권세와 능력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서 우리의 동굴을 터널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히브리서 13장 5절에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고 순종함을 배울수록 삶의 출구는 넓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더 믿고 주님께 더 순종하면 할수록 우리가 나갈 터널의 입구는 더 넓어지고 더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주님은 상을 주려고 와 있지 여러분에게 고통주려고 와 있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주님이 여러분에게 필요한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상주시는 예수님을 믿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를 여러분, 상을 주시는 예수님 좋은 이미지의 예수님을 갖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떻게 믿고 순종할까요? 믿고 순종하는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 밑에 나가서 내 신발을 벗어 놓는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베풀어 주신 그 축복을 마음속에 생각해서 십자가를 통한 오중복음의 생각을 꽉 마음속에 가지고 십자가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꿈을 꿉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꿈을 꾸고 현재에 내가 아무리 생활이 형편없고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잘될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으면 하겠네. 현재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믿음으로써 더 나은 내일을 향해야 될 것이고 입술의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입술로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좋아진다. 나는 튼튼해진다. 나는 밝아진다. 나는 해결된다. 나는 승리가 온다. 나는 축복이 올 것이다. 입술로써 여러분의 운명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개미도 집을 짓지 않습니까? 까치도 집을 짓고... 누에도 집을 짓습니다. 여러분도 집을 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무슨 집을 짓습니까?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집을 짓는 것입니다. 누에가 여러분 고치를 지을 때 보면 굉장합니다. 한때 뽕잎을 잔뜩 먹더니만 그 다음에 고치를 만들 때 많은 누에고치를 칠 때 소리가 쏴~아 하고 소리가 납니다. 하도 어릴 때 봐서 세월이 오래 되어서 많이 잊어버리기는 잊어버렸지만 입에서 실을 가지고 나와서 자기 집에 들어갈 집을 짓는데 대단합니다. 입술로... 이렇게 해서... 비단옷도 해 입는 집을 지어요.

여러분의 집은 여러분의 입술에서 집을 짓는 것입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에서 나온 말로 내가 사로잡힌 바 되었다. 죽고사는 권세가 입에 있으니 혀를 사용하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그러므로 여러분도 전부 다 고치를 만드는 누에들입니다. 누에라고 말하니까 사람을 누에로 비유하느냐 그러지만 비유컨대 그렇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쉽지 않습니까? 아 내가 누에 입에서 나와서 비단으로써 집을 짓는 것처럼 나도 집을 지어야 되겠다. 여러분 집을 지으세요. 병이 든 사람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고 자꾸 말하므로 건강의 집을 지으세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하였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였으므로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입으로 자꾸 축복의 집을 지으십시오. 얼마 안 있으면 아름다운 집이 되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그 속에 살게 될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믿고 순종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금세 안심, 내세 복락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금세는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금세는 버리고 죄사함이나 받고 내세에 들어가서 잘 살아라. 그것이 주님의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은 금세 안심, 내세 복락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주님 오셔서 못박힌 것은 금세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것은 내세에 우리에게 영생 복락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금세에 오늘날 여러분의 죄를 청산하고 우리의 허물을 청산하고 우리의 병을 청산하고 우리의 저주를 청산하고 내세에 영생복락을 주고 하나님의 보좌를 주고 시민권을 주고 영생복락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혼이 잘되는 것이 첫째지만 둘째 범사도 잘되고 강건도 해지는 전인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면 이와 같은 주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라
그러므로 이제 우리 남은 여생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품은 바꾸지를 못해요. 태어날 때부터 그 성품 그대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여러분 성격을 가지는데 성격은 못 변합니다. 그러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인격입니다. 그 사람 참 훌륭한 인격자다. 인격은 자기가 노력해서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로 4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시련을 겪는 것은 시련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인격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시련이 없으면 믿음을 배울 수가 없는데 시련이 오면 믿음이 자라고 믿음이 연단을 받아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14절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을 우리도 같이 동참을 하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가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난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면 참여한 만큼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에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걸머지면 걸머질수록 십자가의 부활의 영광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반드시 고난 그 동등 이상의 축복을 가져오는데 그 고난을 통해서 생명의 역사가 다가와서 우리에게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 인격적 변화가 다가온 것은 고난을 통해서 다가온 변화지 여러분이 수양과 도덕을 닦아서 얻은 변화는 지극히 적은 것입니다. 고난이 괴로움 같지만 심히 적은 고난이 큰 영광을 여러분 생애 속에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반드시 여러분에게 해롭지 않습니다. 고난은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축복을 여러분에게 가져오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고난 앞에 여러분 하나님이 밥상차려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 앞에서 밥상차려 주시고 그것을 미끼로 해서 성령 기름을 주어서 능력을 주어서 더 큰 일을 하여 잔이 넘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밥상도 없고 성령기름 부음도 없습니다. 편안하게 살아서 좋기는 하겠지만 밥상이 없습니다. 원수 앞에서 하나님 밥상 차려 주시는 것은 원수를 극복하라고 밥상 차려 주시는 것이므로 밥상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밥상 맛있습니다. 소금국에 쌀밥 지어주지 않습니다. 일류음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먹는 음식이 아니라 원수 앞에서 하나님은 밥상 차려 주신다는 것은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온갖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권세와 하나님의 축복으로 퍼부어 주어서 체험할 수 없는 영적인 밥상을 차려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원수 보는 앞에서 기름 부어 주셔서 하는 일마다 성공을 척척 시키고 잔이 넘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는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땅굴 속에 가둬 버리지만은 예수님은 땅굴에 터널을 만들어서 밖으로 나가서 더 큰 성공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게 되면 자기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깨닫게 되므로 고난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을 당하면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더 배우게 되고 회개하고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5절로 7절에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고난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이 징계를 통해서 여러분을 아들로써 장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아들 교육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이 다가와야 주님을 찾고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편안하니까 하나님 찾지 않지요. 내가 고통스러우니까 새벽기도도 나오고 철야기도도 나오고 오산리기도원에도 가는 것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도 그래요. 대개 답답하면은 오산리기도원으로 갑니다. 편안하면 우리 집에서 잡니다. 제가 옛날에 목회할 때는 매주일 마다 기도원에 올라가서 하루에 4시간, 5시간씩 엎드려 기도했는데 요사이는 그 반도 반도 못해요. 내가 은퇴하고 난 다음 책임이 없어졌으니까. 내 양심에 야~ 너 5시간씩 기도했는데 너 요즘 몇시간이나 기도하나? 그것요? 이영훈 목사님이 할것이고 내가 할 것 아닙니다. 나는 이미 다 졸업하고 나왔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되는데 자꾸 그렇게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기도원에 가라. 아이구 오늘 기도원에 가기 너무 피곤해요. 오늘 집회 갔다와서 너무 피곤하고 잠이 모자르니까 잠 좀 한숨 자겠습니다. 가는게 좋지 않으냐. 거기 이영훈 목사 가는데... 내가 책임을 벗고 나니까 편안하게 되니까 어려운 짐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찾고 갈망하는 마음이 없어요. 왜냐하면 전에는 힘이 없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와 총명으로 못하므로 하나님 도와달라고 부르짖고 갈망했는데 하나님 도움 없이도 이제는 일 잘 끝내고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믿음을 지키고 천당갈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편안하게 살다 가야지 그런 마음이 자꾸 생기는데 그것 못된 생각이지요. 그런데 그런 마음이 언제 사라지느냐. 고통이 다가오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고통만 다가오면은 그런 변명 안해요. 아이고 하나님 날 좀 살려주세요 하고 매달리기 시작하지요.

시편 91편 14절로 16절처럼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이렇게 하나님을 찾으면 좋은 일이 생겨난다구요. 하나님을 찾으면 구원해 주시고 높여 주시고 응답해 주시고 영화롭게 해주시고 장수를 주시고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좋은 일 해주시기를 원해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으면 신앙의 성숙과 변화를 갖고 옵니다. 하나님께 나가서 변화 안될 때가 있습니까? 여러분, 사람도 훌륭한 사람을 만나면 그 제자도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여러분이 사귀는 친구가 좋은 사람이면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더 많은 같은 시간을 지내는데 하나님 인격으로 우리가 닮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4장 16절로 18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가 지금 보고 사는 것은 생이 살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잠깐 보고 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은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들어가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가 변화를 받고 성숙해지는 것은 고난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잠시 당하는 고난이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나에게 이루게 하십니다.

<결론>
여러분, 고난의 터널을 통함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인격의 수련을 받을수록 터널을 통과해 나올 때마다 믿음이 자라고 소망이 넘쳐나고 사랑이 충만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면 통할수록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의 인격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하면 통할수록 그 자라나는 인격과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이 귀히 사용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인생에 다가오는 동굴을 피하지 마시고 예수님과 더불어 통하십시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동굴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같이 계심이라. 예수님이 우리 터널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님은 죄를 통과해 나가는 터널이다. 나의 모자란 행동을 벗어나는 터널이다. 병을 통과하는 터널이다. 가난을 통과하는 터널이다. 죽음의 감옥을 지나가는 터널이다.

우리를 가두어 놓을 감옥은 없습니다. 우리가 절망할 동굴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모든 동굴은 터널이 되고 문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활짝 열린 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너희를 자유케 하려고 너희에게 자유를 주었은즉 그러므로 믿음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유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유의 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질병에서 자유를 저주에서 자유를 죽음에서 자유를 얻은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토굴을 지남으로 말미암아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을 얻고 예수님을 더욱 튼튼히 붙잡고 영혼이 더욱 잘되고 범사에 더욱 잘되고 더욱 강건하고 더욱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어 항상 모든 일에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 기도하겠습니다.

/ 2012. 6. 3. 성찬주일설교




출처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56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