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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의 집’ 설립자 조동진 목사 (13) ] 화해와 평화 선교를 통한 통일환경 조성②
2011년 04월 06일 (수) 10:02:25박민균  min@kidok.com

북미 화해 위한 노력 결실을 맺다

 

  
 ▲ 조동진 목사의 한반도 평화와 통일 사역은 북미관계 개선에 큰 진전을 이루었다. 1991년 조동진 박사는 랄프 윈터 박사의 지원을 받아 북한 UN 한시해 대사와 대표단 일행을 미국에 초청, 북한 대표단이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게 김일성 주석의 평양방문 초청장을 전달하는 역사적인 일이 이루어지도록 도왔다. 사진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면담하는 북한 대표단. 
 
199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UN주재 한시해 대사와 7명의 대표가 미국을 방문했다. 윌리암케리대학교 총장 랄프 윈터 박사(Dr. Ralph D. Winter)의 노력으로 미국국무성은 이들 여덟 명의 북한대표단에게 미국방문사증을 발급했다. 나는 이 여덟 명의 미국 왕복 여비를 마련하여 항공권을 평양으로 보냈다.

1991년 6월 1일 미국 뉴욕케네디공항에 도착한 일행의 미국 체류 일정 중 가장 놀라운 일은조지아 주 플레인에 있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방문한 일이다. 이러한 주선은 나의 요청으로 윌리암케리대학교 랄프 윈터 총장의 노력으로 성사되었다. 6월 6일 오전 워싱턴 댈러스공항을 떠난 북한 한시해 일생의 안내는 윌리암케리대학교 개발담당 부총장 찰스 위크먼 박사(Dr. Charles A. Wickman)와 내가 맡았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그의 부인과 함께 한시해 대사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한시해 대사는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북한의 김일성 주석의 초청을 공식으로 전달했다. 지미 9카터 대통령은 이를 수락하는 조건으로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한국 노태우 대통령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 북경을 통한 평양 방문이 아닌 판문점 휴전선을 통해서 평양에 갈 수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 역사적인 김일성 주석의 지미 카터 대통령 평양 초청은 공화당 부시정권이 끝나고, 민주당 클린턴 정권이 들어서야 성취된다. 1994년 4월 지미 카터 대통령은 휴전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 김일성 주석을 만나게 된다.

나의 이러한 북한과 미국 간의 화해 노력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 김일성 주석은 1992년 5월 23일, 조선로동당중앙위원회 명의로 나를 주석궁으로 초청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주석궁으로 갔다. 접견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일성 주석은 나를 만나자 마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나와 아내를 접견실로 안내했다.

김일성 주석은 한시해 대사가 카터 대통령을 만나도록 노력한 것에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리고 나의 북미관계 개선을 통한 화해와 평화의 노력을 계속 치하했다.

김일성 주석은 또한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하지 않을 것을 미국과 약속할 수 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소련식 핵발전소를 건설하려던 것을 중단하고, 미국식 경수로발전소로 바꿀 수 있도록 미국의 도움을 받기 원한다고 했다.

김일성 주석은 자신의 어린 시절 교회에 다녔던 경험과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앙생활을 들려주면서 그의 자서전 <세기를 넘어서> 제1권과 제2권을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김일성 주석은 이어서 오찬장으로 나를 안내하여 오찬을 베풀었다. 오찬장에 김일성 주석은 유격대 생활을 할 때 먹었던 언감자국수를 내놓으며 언감자 국수의 내력을 자세히 설명해 주기도 했다.

김 주석은 그 날 오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회 간부 100여 명을 모아 내가 “민족과 교회”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도록 준비했다. 나는 그 후 계속 1993년, 1994년 세 차례에 걸쳐 주석궁으로 초대를 받아 김일성 주석과 오찬을 함께 하며 대담을 하게 된다.

나의 북한과 미국 간의 화해를 통한 조국의 평화통일선교는 2000년 6월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으로 가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6ㆍ15 선언을 하기까지 계속되었다.




출처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695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