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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집’ 설립자 조동진 목사(3)] 미국 유학을 하다
2011년 01월 21일 (금) 10:19:05기독신문  ekd@kidok.com

  
WEF 장학생으로 선교학 연구


  
 ▲ 조동진 목사는 에즈베리신학교에서 선교학을 전공하고, 선교학자의 길로 들어선다. 신학교 졸업식 모습. 
무교회면 개척전도에 실패한 나는, 1950년 6ㆍ25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6월 14일 전라남도 순천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여수가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간 7월 25일 부산으로 잠시 피난을 갔다가 여수로 돌아오자마자 순천노회의 지리산 밑 구례군 여덟 교회 목사와 전도사들이 모두 빨치산들에게 몰살당한 소식을 듣게 됐다. 순천노회는 구례군의 여덟 교회를 수습하기 위해 보낼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나는 내가 가장 젊고 가장 최근에 목사가 된 것을 생각하며, 노회 긴급회의에서 손을 들고 일어나 “나를 보내 달라”고 자원했다.

이렇게 나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알려진 지리산 밑 목자 잃은 구례군 여덟 교회 수습을 맡은 구례읍교회 목사가 된다. 1951년 7월이었다. 나는 만삭인 아내 나신복과 함께 구례읍에 도착하였고, 첫 날부터 빨치산의 구례읍 습격을 경험하게 된다. 그로부터 1953년 3월까지 2년 반 동안 밤마다 빨치산의 총소리를 들으며 지리산 밑 구례군의 여덟 교회를 돌아본다. 1953년 빨치산 토벌이 끝나자 나는 구례를 떠나 임시수도 부산으로 갔다. 그리고 1953년부터 <기독공보>의 편집국장으로 기독교 저널리스트 활동을 시작했다.

1953년 여름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읍교회에서 개최한 ‘신앙동지회’ 하기수양회에서 미국 TEAM선교회 선교사로 한국 <생명의 말씀사>를 창립한 풀러신학교 출신 윌리암 가필드(William Garfield)를 강사로 초청했다. 가필드 선교사는 신앙동지회의 취지가 미국복음주의협의회(NAE)와 동일하다며 NAE 조직을 소개했다. 나는 신앙동지회를 ‘한국복음주의협의회’(Korean NAE)로 개편할 것을 제의했다. 이렇게 신앙동지회 수양회에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창립됐고 나는 창립총무로 선출됐다.

나는 다음 해인 1954년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국제총무 엘윈 라이트(Elwin Wright)박사를 한국에 초청해 한국 NAE 가입을 신청했다. WEF 라이트 국제총무는 한국 NAE의 WEF 가입신청을 공식으로 접수하고, 귀국 후 1956년 8월 미국 로드아일앤드 주 프로비던스에서 개최하는 WEF 총회에 한국 대표단을 공식초청하고 총무인 나를 WEF 장학생으로 미국 유학 초청장을 보내왔다. 한국 NAE는 제2대 NAE 회장이었던 이대영 목사 등 5명의 한국 대표를 조직하면서 WEF 장학생으로 초청받은 나를 대표단 일원으로 선정했다.

나는 먼저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의 배링턴대학(Barrington College), 펜실베니아 주 포트와싱톤의 WEC선교회 선교사훈련원 하기단기과정을 수료한 후 일시 귀국했다. 그 다음 해 계속해서 미네소타 주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베다니선교대학(Bethany Missionary College)에서 수학하고, 1958년 캔터키주 윌모어의 에즈베리신학교(Asbury Theological Seminary) 대학원으로 옮겨 선교학과 전도학 그리고 교회행정학을 전공하여 Th.M.과정을 마친 후 1960년 귀국하였다.

나는 베다니선교대학의 학장이었던 해거 박사의 선교사 훈련방식에 큰 영향을 받아 훗날 바울의 집에서 베다니선교대학의 훈련방식을 많이 채택했다. 에즈베리신학교에서는 로버트 콜맨(Robert Coleman) 박사에게서 전도학을, 존 T. 씨맨드(John T. Seamand) 박사로부터 선교학을, 그리고 W. 커리 메이비스(W. Curry Mavis) 박사에게서 교회행정학을 사사받았다. 1961년 나는 모교인 총신대학(당시 총회신학교)에서 한국 최초로 선교학 강좌를 개설했다. 이렇게 나는 비서구 세계 최초의 선교학자로서의 길에 들어섰다



출처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68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