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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집’ 설립자 조동진 목사(2)] 신학 교육을 받다
2011년 01월 12일 (수) 15:02:44기독신문  ekd@kidok.com

  
신학 우등생이 전도에는 낙제생


  
 ▲ 신학교 졸업식에서 조동진 목사와 나신복 사모. 두 사람은 신학교 동창으로 졸업하고 약혼했다. 
나는 1946년 1월 평안북도 의산노회에서 목사후보생 고시에 합격하고 노회장 김관주 목사의 추천서를 가지고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1946년 9월 서울에 있는 조선신학교(현 한신대)에 입학하여 신학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47년 3월 신학교 학생 50여 명이 조선신학교 교수들의 성경오류설과 자유주의 신신학을 거부하는 선언서를 대한예수교총회에 제출했고, 신학교는 이 선언문을 적성한 51명의 신학생들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내리게 되었다. 나는 신학교 교장 송찬근 박사에게 항의문을 전달하고 스스로 학교에서 물러나와 무기정학으로 학교에서 쫓겨난 51명의 학생들과 함께 <정통을 사랑하는 신학생 신앙동지회>를 조직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중국 만주에 있는 봉천신학교 교장 박형룡 박사를 귀국하시도록 연락하여 부산에 세워진 고려신학교로 옮겨가 신학교육을 계속 받게 된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 출옥한 성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고려신학교가 심사참배를 결의하였다는 이유로 40년 역사를 지켜온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를 거부하고 별도의 총회를 조직하려고 했다. 조선신학교에서 옮겨왔던 <정통을 사랑하는 신학생 신앙동지회> 학생들은 새로운 총회 조직을 거부하고 박형룡 박사와 함께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면서 나도 동참했다.

나는 남산 조선신궁 자리에 세워진 기독교박물관에 임시교사를 마련하는데 앞장섰다. 임시 기숙사는 미군 천막을 남대문시장에서 사다가 기독교박물관 옆에 마련하였다. 이사회 조직을 위해 학생들을 모아 서울에 있는 주요 목사들을 방문했다. 교장 박형룡 박사의 사택을 위해 청파동에 있는 이층짜리 적산가옥을 임대 계약하여 2층은 여자 신학생 기숙사로 사용했다. 교수와 강사진은 일본와 미국 유학을 마친 교역자들 중에서 초빙했다. 몇 달이 되지 않아 충무로 5가에 기숙사가 마련됐다. 기독공보사 발행인 김을락 장로가 자신의 주택을 기숙사로 헌납한 것이다.

1948년 3월에 개교한 신학교는 3개월 후인 6월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나는 제2회 졸업생으로 1949년 6월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나는 졸업 1년 전부터 황해도 신천에서 온 피난민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서대문교회를 개척하고 개척교회 전도사로 첫 교회사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1949년 6월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나는 졸업 직후인 1949년 7월 7일 서울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의 주례로 신학교 동급생 나신복과 결혼했다.

주께 부르심을 받던 1945년 12월, 나는 교회 없는 곳을 위한 전도자가 되겠다고 주님께 서원했었다. 그래서 나는 무교회면(교회가 없는 면 소재지)을 찾아야했다. 제1회 졸업생들이 많이 목회하고 있던 순천노회에 무교회면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제1회 졸업생으로 광양 검거중앙교회에 시무하던 정규오 목사가 여수군 쌍봉면이라는 무교회면이 있는데 가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연락이 왔다. 나는 즉시 전라남도 여수군의 무교회면인 쌍봉면에서 개척전도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신학 우등생이었던 나는 전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었다. 결국 나는 신학 우등생이었지만 전도에는 낙제생이 되었다. 나는 개척전도사 생활에 실패하면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전도와 선교를 공부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출처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68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