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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집’ 설립자 조동진 목사(1)] 나의 성장과 소명
2011년 01월 07일 (금) 17:12:16기독신문  ekd@kidok.com

  
1945년 성탄절 직전, 부름 받다


  
 ▲ 조동진 목사 출생 200일을 맞아 아버지 조상항 어머니 장송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나는 1924년 12월 19일 이른 새벽 평안북도 용천군 양광면 충렬동 566번지에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 조상항(趙尙亢)은 한양 조씨(漢陽趙氏) 참판공파(參判公派) 24대손인 조시건(趙時健)의 여섯 아들 중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는 10세 어린 시절에 친척이 살던 의주군 피현면 노북동에 갔다가 그곳 노북동교회에서 처음으로 주일예배에 참석하였고, 그날부터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1900년대 초기 한국 그리스도인 중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평안북도 선천의 신성중학교 학생이던 1910년 105인사건과 신민회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한 해 동안 감옥생활을 하셨다. 그 후 민족해방과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4년 중국 상해와 청도에서 활동했다. 독립운동 중이던 1916년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일본 구주의 나가사끼로 압송되어 사형 구형을 받고 1923년까지 7년간 복역하였다.

아버지는 안동 장씨 장경부의 삼녀 장송실과 결혼하여 첫 아들 나를 낳았다. 가출옥으로 일본 경찰의 감호대상이었던 아버지는 장남인 내가 태어난 지 한 달도 못되어 전라북도 고창군 하오산으로 정배를 갔고, 하오산교회 순회선교사였던 서국태(도날드 스위코드 Donald Swicord)에게 내가 유아세례를 받도록 했다. 그 날은 내가 백일을 맞은 1925년 4월 2일이었다.

나는 일제의 감호 하에서 항상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아버지를 따라 돌아다녔다. 초등학교도 서너 번 전학을 해야 했고, 중등학교 교육도 매우 불운한 처지에서 일제의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1940년 고향에서 홀로 지내는 어머니에게 돌아온 나는 1941년 훈도(지금의 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피현 중원학교와 고관국민학교 훈도로 지내다가 일제의 징병령에 따라 1945년 8월 18일 군에 입대하라는 소집영장을 받았다. 그러나 군 입대 3일 전인 8월 15일 일본의 패전 항복으로 해방을 맞게 된다.

나는 1941년 1월 평안북도 용천군 동상면 용산동에 있는 용산교회에서 독립운동가였던 김예진 목사로부터의 입교예식을 통하여 정식으로 교회 봉사를 시작하게 된다. 그 후 평안북도 피현면 당후교회와 고관면 토교교회에서 성가대장과 주일학교 유년부장, 그리고 집사로 제직회 서기와 회계를 맡는 등 일제 말기 일본의 교회 핍박 아래서도 교회봉사를 계속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부르심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12월 크리스마스 직전이었다. 내가 집사로 봉사하던 토교교회에서 최한기 전도사를 강사로 초청해 해방 후 첫 부흥회를 열었다. 최한기 전도사는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7년 간 투옥되었고 해방되던 해 풀려난 ‘출옥성도’ 중 한 분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부흥회를 준비하면서 이 부흥회를 통하여 나를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다는 서원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이러한 서원기도를 마음속으로 강하게 거역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흥회 셋째 날 밤 성령께서 나를 거꾸러뜨리셨다. 최한기 전도사의 설교가 시작되는 순간, 나는 성령의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 그 자리에 거꾸러졌으며 어린 시절부터 지은 부끄러운 죄가 눈앞에 활동사진처럼 나타나는 순간 땅바닥을 치며 통곡하고 회개하며 기도했다. 나의 통곡하고 애통하는 기도는 삼일 삼야 부흥회가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계속되었다. 어머니는 나의 곁에 서시고 부흥강사 최한기 전도사와 담임목사 김태주 목사는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나는 나의 생애를 바쳐 교회 없는 곳에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 것을 서약하고, 토고교회가 속해 있던 의산노회에서 목사후보생 시취를 받고 목사후보생이 되었다.




출처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68205